사는 데까지 살아있는
사는 데까지 살아있는
  • 등록일 2019.11.21 19:44
  • 게재일 2019.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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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벼를 베어낸 그루터기에 파랗게 싹이 돋았다. 머지않아 닥쳐올 추위에 얼어 죽기 마련일 터인데, 물기가 조금이라도 있는 논마다 제법 생기롭게 자라나 있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풀은 베어내면 금방 또 새싹을 낸다. 절기 따위 아랑곳없이 최소한의 조건만 되면 몇 번이고 다시 시작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벼 그루터기 뿐 아니라 풀을 깎은 논둑에도 때아니게 새 풀들이 자라고 있다. 식물이 생장을 하는 목적이 꽃 피우고 열매 맺는 것이라면 이런 늦가을의 새싹이란 한갓 무모하고 부질없는 게 아닌가.

사람은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 대다수 사람들이 수긍하는 교훈이다. 그래야 보다 가치 있고 보람된 성과를 이룰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런 목적도 없는 삶은 무의미한 허송세월일 뿐이라고 지탄한다. 맞는 말이다. 사회나 개인이나 발전하고 성취하려면 뚜렷한 목표와 굳센 의지가 필요하고, 거기에 부단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 그런데 목표의 유무를 따지기 전에 먼저 생각할 것은 어떤 목표를 갖느냐다. 무엇을 목표로 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인생이 될 것이므로. 보통은 남보다 많이 가지고 높은 지위에 오르는 걸 출세라 하고 거기에 이르는 걸 성공이라고 믿는다. 그래서 열심히 태교를 하고 유치원부터 대학에 이르기까지 수단과 방법을 다해 스펙을 쌓고 학업에 매진한다. 그러나 그것이 출세라는 목표에 도달할 확률을 높이는 건 사실이지만 해피엔딩까지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걸 드물지 않게 본다.

소위 출세를 위해서 희생하고 쏟아 부은 것에 비해 성취감이나 만족도는 충분하지가 못한 경우가 많다. 더 많이 차지하고 보다 높이 오르기 위한 욕망은 쉽사리 채워지지 않고, 오히려 그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비극적 결말을 초래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이다. 방송 드라마의 스토리가 대부분 그런 것이고 매스컴에 오르는 사건사고 대다수도 그런 범주의 일들이다. 근자에 온 나라를 들썩이게 한 어느 가족의 경우를 보더라도 삶의 목표 설정에는 올바른 선택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된다. 인생의 목표에는 몸과 마음의 건강이 기본이라는 생각이다. 우선은 몸을 상하는 일을 말아야 할 것이고, 그것에 못지않게 마음(정신)의 건강도 챙겨야 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취미와 소질과 능력에 맞는 목표를 정하는 일이 바람직할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정신으로 성취한 것은 결국 진정한 보람과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닫는 경우가 많다.

늦가을 들판의 벼 그루터기에 돋아난 새싹들이 보여주는 메시지는 또 다른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는 것, 삶이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란 것, 매순간 살아있는 그 자체가 목적이고 완성이라는 것, 그래서 대자연을 호흡하며 살아있는 데까지 살아있는 것이야말로 장엄한 우주적 사건이라는 것이다. 살아서 내 몸에 와 닿는 햇볕과 바람과 눈비를 체감하는 일이 가장 절실하고 궁극적인 삶의 성취이라는 것이다. 바람이 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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