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과 아시아
유럽과 아시아
  • 등록일 2019.11.20 20:09
  • 게재일 20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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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종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1988년 햇살이 따사로웠던 4월 중순, 로렐라이 언덕을 찾아가는 길에 라인과 모젤, 란 강이 만나는 코블렌츠에서 중년신사와 대화를 튼다. 유럽의 시간은 영원히 사라진 것 아니냐는 나의 질문에 아니라는 답이 순식간에 나온다. “유럽은 한 지붕 아래!” 하고 그가 간명하게 말한다.

장구한 세월 유럽은 고만고만한 나라들이 각축을 벌이며 살아왔다. 특별한 절대강자 없이 전개된 피의 역사에서 ‘유럽은 한 지붕 아래’라는 전통이 세워진 것이다.

‘유러피언 드림’에서 세계주의자 리프킨은 유럽이 공유하는 두 가지로 기독교와 계몽주의를 제시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한 이래 유럽은 예수와 마리아의 그늘 아래 있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학’에서 인류역사에서 최고의 가치를 구현한 4인으로 예수와 마리아, 베드로와 바울을 거명한다. 지리상의 발견과 신대륙 착취에 기초한 17-18세기 계몽주의는 유럽의 과학적 세계관과 제국주의에 결정적으로 기여한다.

그런 맥락으로 유럽을 보면 대강(大綱)이 잡힌다. 에르도안 이후 터키는 더 이상 유럽연합 가입에 목을 매지 않는다. 이슬람이자 계몽주의와 무관한 오스만튀르크의 후예가 어찌 유럽연합 회원국이 될 수 있겠는가?! 동유럽 국가들과 달리 제국의 영욕(榮辱)을 역사적인 자산으로 가진 러시아도 유럽연합과 무관하다. 그들은 유럽과 아시아 사이에 끼어있는 지리적 조건으로 인해 19세기 중반에 정체성 혼란을 겪은 일도 있다. 그런데 프랑스 대혁명과 결부해 흥미로운 사실이 보인다. 프랑스는 물론이려니와 영국과 도이칠란트, 오스트리아까지 대혁명과 결부한 혁명문학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837년 뷔히너가 장막희곡 ‘당통의 죽음’, 1859년에 디킨스가 ‘두 도시 이야기’, 1862년에 위고가 ‘레미제라블’을 쓴다.

위고가 “예수 탄생이후 가장 위대한 사건”이라고 규정한 프랑스 대혁명을 문학적인 자산으로 공유하는 유럽. 하지만 아시아에는 그런 전통이 없다. 동북아의 절대강자 중국과 남아시아의 패자 인도,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 및 서남아시아의 무슬림 국가들과 이스라엘에 이르기까지 아시아에는 유럽이 공유하는 종교-문화-예술적인 자산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처럼 다채롭고 중층적인 아시아는 커다란 덩어리로 나누어 이해하는 편이 수월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습근평이 주도하는 ‘일대일로’에 눈길이 간다. 현대판 실크로드 ‘일대일로’가 어디까지 순항할지 궁금하다. 요즘 우리를 사로잡는 홍콩시위는 다른 과제를 던진다. 홍콩의 민주화투쟁이 어떤 의미인지, 숙고해야 할 듯싶다. 유럽 내지 영국식 민주주의의 고수인지, 중국 내정문제인지, 혹은 대만까지 포괄하는 동북아 전체문제인지, 명징한 판단이 쉽지 않다. 막강한 백과사전을 손에 쥐고 있지만, 세계적인 문제의 올바른 인식과 정의는 난맥상이다. 숱한 사건과 전쟁으로 점철된 유라시아 동과 서에 자리한 아시아와 유럽은 특별하게 공유하는 대목이 없다. 그럼에도 유럽과 아시아는 정말 많이 다르다, 하는 것만은 분명한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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