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연포탕’이라고 부르는 낙지탕. 연포탕은 낙지가 아니라 두부로 만든 국물음식, 탕이다.
흔히 ‘연포탕’이라고 부르는 낙지탕. 연포탕은 낙지가 아니라 두부로 만든 국물음식, 탕이다.

‘연포탕(軟泡湯)’이라는 음식이 있다. 누구나 알만한 음식, 연포탕을 거창하게 설명하는 이유가 있다. 연포탕을, 흔히, 낙지와 무 등 채소를 넣고 끓인 음식으로 여긴다. 낙지가 비교적 흔한 서해안 일대의 고유 음식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많다. 틀렸다.

연포탕은 연포로 끓인 탕, 국물 음식이다. ‘軟泡(연포)’는 ‘연한 두부’다. 연포탕은 부드러운 두부로 끓인 탕이다. 낙지탕이 아니다. 무슨 그런 억지를 피우느냐고, 고개를 갸웃거릴 필요가 없다. 원형 연포탕은 연한 두부에 닭고기, 닭고기 국물을 더한 음식이다.

‘동국세시기’ 10월 부분에 나오는 내용이다.

◈ 두부 연포탕

요즈음 반찬 중에 가장 좋은 음식은 두부다. 두부를 가늘게 썰고 꼬챙이에 꿰어 기름에 지지다가 닭고기를 섞어 국을 끓이면 이것을 연포탕(軟泡湯)이라고 한다. 여기서 포라는 것은 두부를 말하며 한 나라 무제 때 신하 회남왕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상고하면 육방옹(陸放翁)의 시에 이르기를 솥을 닦고 여기(黎祁)를 지진다는 글 뜻의 주(註)에 촉인(蜀人)은 두부를 ‘여기’라고 부른다고 한 것을 보니 지금의 연포가 곧 이것인 것이다.

명확하게 두부 탕이 연포탕임을 설명한다. 지금의 두부 탕과는 얼마간 다르다. 두부를 가늘게 썰어 꼬챙이에 꿴다. 두부 꼬치다. 날두부를 넣지 않는다. 꼬치 두부를 한번 지진다. 국물은 닭고기로 만든다. 닭고기를 섞어서 국을 끓인다.

두부는 ‘포’다. 연한 두부면 연두부 탕, 곧 연포탕이다.

‘동국세시기’는 1849년(헌종 15년)에 완성되었다. 19세기 중반이다. 저자 홍석모(1781∼1857년)는 18세기 후반에 태어나서 19세기 중반에 죽었다. ‘동국세시기’의 내용은 19세기 초중반, 조선사람들이 생각하고 겪은 내용을 기술한 것이다. 두부나 연포탕도 마찬가지다. 그 이전부터 19세기 중반까지도 연포탕은 연두부 탕이었다. 어느 순간부터 연포탕에 낙지가 들어가고, 연포탕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육방옹은 이름이 육유(1125∼1210년), 호가 방옹. 지금의 절강성 소흥 출신이다. 육방옹의 시대는 12세기 후반, 13세기 초반이다. 육방옹이 이야기하는 ‘촉나라 사람들의 여기가 두부’라는 이야기도 13세기 남송 사람들의 시각이다.

 

태백산맥 언저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순두부 전골.
태백산맥 언저리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순두부 전골.

한나라 무제 때 회남왕 유안(기원전 165~122년)이 두부를 처음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곧이곧대로 믿을 수는 없다. 유안이 만든 두부가 좋았다고 하지만 ‘유안 두부’는 한나라가 아니라 후대의 이야기다. 한나라 무제의 전한(前漢)은 기원전 202년~기원후 8년 사이에 있었던 나라다. 두부는 이보다 뒤 시대에 중국 대륙에 나타난다는 기록이 오히려 많다. 육방옹의 두부 이야기도 남송 시대, 12세기 말의 내용이다. ‘두부’가 중국 측 기록에 나타나는 것은 당나라 때다. 당(618~907년)은, 7세기 초반에서 10세기 후반의 나라다. 우리의 통일신라 시대와 겹친다.

더 우스꽝스러운 것은 ‘두부와 왕’의 상관관계다. 예나 지금이나 두부 만드는 일은 육체적으로 고되다. 유안은 회남왕이다. 황족이고, 작은 지역 회남의 왕 노릇을 했던 이다. 정치적으로 힘든 시기를 살았다. 유안은 결국 마흔넷의 나이로 자결했다. 역모와 반란 혐의였다. 정치적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황족이 두부를 만들었다? “유안의 시대에”라고 하면 이해가 된다. “유안이 두부를 처음 만들었다”는 표현은 어색하다. 황족이 두부를 잘 만들었다는 이야기는 역시 받아들이기 힘들다.

콩도 문제다. 두부를 만드는 콩은, 널리 알려져 있다시피, 만주 일대가 원산지다. 콩은 북방 기마민족의 것이다. 기마민족은 일찍부터 우유로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었다. 그중 하나가 버터, 치즈 류다. 치즈, 버터와 두부는 만드는 원리는 비슷하다. 치즈, 버터는 동물단백질을 굳힌 것이다. 두부는 식물 단백질을 굳혀서 만든다. 북방 기마민족은 이미 우유를 굳혀서 버터, 치즈를 만들었다. 두부는 북방 기마민족을 통해 중국으로 흘러들었다는 주장이 힘을 얻는 이유다.

 

촛물두부. 두부를 만든 후, 일정 부분 두유나 간수를 더 한 국물을 남긴 것이다.
촛물두부. 두부를 만든 후, 일정 부분 두유나 간수를 더 한 국물을 남긴 것이다.

우리도 일찍부터 두부를 먹었다. 여말선초의 목은 이색(1328~1396년)은 ‘먹보 영감’이다. 음식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먹보 영감 목은이 두부를 빠트렸을 리 없다. ‘목은시고_권 33_시’의 내용이다. 제목은 ‘대사(大舍, 승려)가 두부를 구해 와 먹이다’이다. ‘大舍(대사)’는 ‘大師(대사)’와는 다르지만, 승려를 높여 부르는 이름이다.

채솟국 맛이 없어진 지 오래니/깔끔하고 뽀얀 두부 맛이 새롭네/성긴 치아로도 먹기 좋으니/진실로 나이 든 몸을 보양한다네/생선, 순채[魚蓴, 어순]를 보면 월나라 사람이 떠오르고/양락(羊酪)을 보면 북방 사람들이 생각난다네/우리나라 땅에서는 이걸 맛있는 음식으로 꼽으니/하늘이 백성들을 잘 보살핀다네

목은 이색은 14세기 사람이다. 중국의 육방옹과는 불과 200년 정도의 차이가 난다. 목은의 두부에 대한 설명은 천연덕스럽다. 목은에게 두부는 새롭게 들어온, 신기한 음식이 아니다. ‘이 땅에서 나오는 맛있는 음식’이다.

시의 내용 중에 월나라의 어순(생선, 순채)과 북방민족(胡人, 호인, 만주족)의 양락이 있다. 어순의 ‘순’은 ‘순채(蓴菜)’다. ‘순갱노회(蓴羹鱸膾)’의 고사에 나오는 바로 그 음식이다. ‘양락’은 양젖 혹은 양 등의 젖으로 만든 음식이다. 월나라 사람들에게는 순채, 북방 만주족에게는 양락이 있듯이, 우리 땅에서는 두부가 난다고 말한다. 두부는 목은의 시대에 전래된 것이 아니다. 그 이전부터 있었던 음식이다. 늦어도 몽골의 원나라 시절 한반도에 전래되지 않았을까, 라고 추정한다.

우리는 두부를 잘 만들었다. 목은보다 약 100년 후의 기록이다. ‘조선왕조실록_세종 16년(1434년) 12월’의 기록이다.

 

순두부와 비지찌개.
순두부와 비지찌개.

“(전략) 왕이 먼젓번에 보내온 반찬과 음식을 만드는 부녀자들이 모두 음식을 조화(調和)하는 것이 정하고 아름답고, 제조하는 것이 빠르고 민첩하고, 두부를 만드는 것이 더욱 정묘하다[而作豆腐尤精妙]. 다음번에 보내온 사람은 잘하기는 하나 전 사람들에게는 미치지 못하니, 칙서가 이르거든 왕이 다시 공교하고 영리한 여자 10여 인을 뽑아서, 반찬·음식·두부 등류[造豆腐之類]를 만드는 것을 익히게 하여, 모두 다 정하고 숙달하기를 전번에 보낸 사람들과 같게 하였다가, 뒤에 중관을 보내어 국중에 이르거든 경사(京師)로 딸려 보내도록 하라. (후략)”

이때 중국을 다녀온 이는 천추사(千秋使) 박신생(생몰년 미상)이다. 박신생은 중국 황제의 칙서 세 통을 가지고 왔다. 두 번째 편지가 바로 위 문장이다. 음식에 관한 내용이다. 콕 집어서 조선 여인들이 반찬과 두부를 잘 만든다고 했고, 두부를 만들 여인들을 연습시켜 다시 보내 달라고 했다. 방법까지 구체적이다. 첫 번째 팀은 두부, 반찬을 잘 만들었다. 두 번째 팀은 잘 만들기는 하나 첫 번째에 못 미친다. 이번엔 미리 훈련 시켜 첫 번째 팀과 같은 수준으로 준비했다가, ‘경사(京師, 수도, 북경)’로 딸려 보내라고 했다.

두부는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끊임없이 발전한다. 연포탕은 조선 초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두붓국인 두부갱(豆腐羹) 정도가 조선 초기 음식이다.

조선 초기인 성종 1년(1470년) 5월의 ‘조선왕조실록’ 기록이다. 제목은 ‘전라도 관찰사에게 민간에 떠도는 요사한 말의 근원을 캐어 의혹을 풀게 하라고 명하다’이다.

 

경남 지리산 일대, 경북 지역에서는 산초기름으로 두부     를 지진다.
경남 지리산 일대, 경북 지역에서는 산초기름으로 두부 를 지진다.

전라도 관찰사(全羅道觀察使) 고태필(高台弼)에게 글을 내리기를, 윤필상(尹弼商)의 반인(伴人) 임효생(林孝生)이 고하기를, 함평(咸平) 사람 김내은만(金內隱萬)의 아내가 내게 와서 말하기를, “입이 셋, 머리가 하나인 귀신이 하늘로부터 능성(綾城) 부잣집에 내려와서 한 번에 밥 한 동이[盆], 두붓국[豆腐羹] 반 동이를 먹었는데 (후략)”

두붓국에 대해서 별다른 설명이 없다. 일상의 음식으로 받아들였다는 뜻이다. 조선 초기에는 두붓국이 일상적이었다. 성종 초기는 조선 시대 유일하게 원상회의가 있었다. 국왕은 나이가 어렸고, 원로대신들은 성종을 추대한 사람들이었다. 허약한 국왕이었다. 민간에는 여러 유언비어가 떠돌았다. 전라도 함평의 ‘한꺼번에 밥 한 동이, 두붓국 반 동이를 먹는 귀신’ 이야기도 그중 하나다.

단순한 두붓국이, 화려한 ‘연포탕’으로 발전하는 과정은 다음 회에 계속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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