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 학예연구사
영양 수비면 하천변 바위서 확인
“수백년 잊혀진 유거지·역사 발굴
실증적 복원사업의 중요한 지표”

조선 중기 영남학파 거두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건립한 정자 ‘계정(谿亭)’의 석각(石刻)이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 하천변에서 발견돼 학계에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

17일 영양군에 따르면 영양군 문화시설사업소가 ‘수산유거지 복원사업’을 추진하던 중 자문위원을 맡고 있는 이영재 영양산촌생활박물관 학예연구사가 최근 수산유거지 동쪽 방향 950여m 떨어진 바위에서 ‘계정’의 석각을 확인했다. 갈암은 영산서원(英山書院) 원장을 역임한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과 최초의 한글 요리책인 ‘음식디미방’을 저술한 여중군자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둘째 아들이다.

그는 20대 중반인 1653년 부모가 낙토(樂土)를 찾아 보다 깊은 산속으로 은거하자 부모를 모시기 위해 영양군 수비면 신원리로 이주했다. 수산유허비(首山遺墟碑) 부근에 ‘갈암(葛庵)’이라는 집을 짓고 19년 동안 거주했다.

갈암이 지은 ‘계정기(谿亭記)’에 의하면 어느날 아버지를 모시고 동쪽에서 흘러 들어오는 신원천(新院川) 가를 걷다가 기이한 바위와 맑은 물소리가 어우러진 명승지를 발견했다.

그곳에 ‘계정(谿亭)’이라는 정자를 짓고 이를 후세에 남기기 위해 바위에 두 글자를 석각했다고 기록했다.

갈암은 조정에 출사해 이조판서를 지냈다.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탄핵돼 유배를 갔다. 1909년에야 관직과 시호가 회복됐다.

이에 따라 후손들에 의해 ‘수산유허비’ 건립이 추진되는 19세기 중반까지 이곳은 잊혀진 장소였다. 1865년 후손과 후학들이 ‘수산유허비’를 건립함으로써 석계 일가가 살았던 유거지는 고증됐다. 그러나 갈암이 형제들과 학문을 닦고 소요했던 ‘계정’은 그동안 장소를 찾을 수 없었다.

이영재 학예연구사는 “복원사업 용역을 추진하고 있는 안동대학교 산학협력단의 단장인 배영동 교수로부터 ‘현지인이 바위에 ‘석ㅇ(石ㅇ)’ 또는 ‘석계(石溪)’라는 석각을 봤다’는 이야기를 듣고 현지인과 확인해 본 결과 그 석각은 갈암 선생의 정자가 있었던 ‘계정’이었다”고 발견 당시의 정황을 전했다.

오도창 영양군수는 “수백 년간 잊혀졌던 갈암 선생의 정자를 다시 찾게 된 것은 지역사의 발굴과 유거지 복원사업에 있어 중요한 성과”라며 “보다 실증적으로 복원사업을 추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지표가 설정됐다”고 평가했다.

영양/장유수기자 jang7775@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