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경한 풍경·소리·냄새… ‘낯선 차원’으로 떠났던 길
생경한 풍경·소리·냄새… ‘낯선 차원’으로 떠났던 길
  • 등록일 2019.11.17 19:45
  • 게재일 2019.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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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경북 바닷길에서 만난 뜻밖의 풍경들

울진 월송정 부근의 카페 ‘노바(NOBA)’.
울진 월송정 부근의 카페 ‘노바(NOBA)’.

이제는 지나온 길들을 추억할 때다. 지난봄부터 시작한 경북 바닷길로의 긴 여행은 겨울비와 함께 끝났다. 그러나 여행은, 단 한 번 물리적 체험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회상이라는 마음의 발걸음을 통해 언제든 재방문과 열람이 가능한 무한재생의 세계다. 나는 겨울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여름으로, 여름에서 봄으로 지나온 길들을 되돌아가며 그때는 미처 눈길을 주지 못했던 풍경과 사람들을 향해 다정하게 인사하고자 한다.
 

울진 월송정서 소음 피하다 찾은 카페

기와지붕에 모던한 통유리가 매력적
포항 ‘커피명가’ 야외테리스에 앉아
영일만 야경 바라보던 기억도 떠올라
사소하기에 특별한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여행과 삶을 환하게 빛낸다

여행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순간은 뜻밖의 풍경과 마주할 때다. 예기치 못한 특별한 경험을 통해 ‘나’의 상투적인 관념과 습관들이 쇄신될 때, 여행은 더욱 가치 있는 체험이 된다. 널리 알려진 명소를 찾는 것이 여행의 큰 기쁨이겠지만, 알려지지 않은 장소를 발견하거나 또는 전혀 특별해보이지 않는 곳에서 특별한 순간과 만날 때 여행의 기쁨은 무한대로 증식한다. 상투성과 관념, 기성의 유행에 길들여진 ‘나’를 낯선 곳으로 데리고 갈 때, 거기서 퇴화된 감각들로 하여금 새로운 감동과 충격을 받아들여 눈과 코와 입을 갱신하게 할 때 여행은 참된 의미를 획득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끔씩이나마 편리하고 익숙한 일상의 자리에서 벗어나 생경한 풍경과 소리, 냄새가 있는 ‘낯선 차원’으로 갈 필요가 있다. 시와 평론, 논문, 칼럼, 에세이 등 온갖 글쓰기로 좀처럼 일상을 벗어날 수 없던 나도 ‘낯선 곳에서의 방랑’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일상에 갇혀 있으니 생각도 고인 물이 되어 썩어갔기 때문이다. 새로움에 대한 갈증이 깊어졌다. 새로움을 위해선 익숙함과의 결별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데, 자기존재를 ‘모르는 자’이자 ‘질문하는 자’, ‘감동하는 자’로 복원하는 과정에는 방랑이 필수적이다.

 

경주 황오동에 갑작스레 쏟아지던 소나기.
경주 황오동에 갑작스레 쏟아지던 소나기.

그동안 부계(父系)의 혈통인 석양을 따라 서쪽으로, 모계 혈통인 “김 냄새 나는 비”(백석, ‘통영1’)를 따라 남쪽 바다로만 다녔던 나는 울진부터 경주에 이르는 경북 바닷길을 이번에 처음으로 ‘종주’했다. ‘종주’의 사전적 정의는 “능선을 따라 산을 걸어,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일”인데, 해안선을 따라 해변을 걸어, 많은 파도를 넘어갔으니 이번 여행을 바닷길 종주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것이다.


여행은 보편 공감의 영역에서 어느 장소의 분위기와 정서를 타인과 공동으로 향유하는 집단체험이 아니다. 개별의 뒷골목에서 상점의 불빛과 음식 냄새와 노랫소리, 살갗에 피어나는 호기심을 나 혼자 감각으로 전유하는 행위다. 특히 경북 바닷길은 패키지 단체 관광이 아닌 단독 자유 여행이어야 한다. 몸은 다시 돌아가도 마음만은 떠나온 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편도 여행이어야 한다. 여행은 어떤 식으로든 사람의 내면을 변화시키기 마련이다. 나는 이번 여행으로 얼마나 달라졌을까? 내 내면을 새롭게 한 감동과 충격들을 어디서 어떻게 만나왔을까?

 

영덕 영해면 괴시리 괴정의 전통 활쏘기 체험.
영덕 영해면 괴시리 괴정의 전통 활쏘기 체험.

지난계절 동안 파도를 수직으로 깎아내는 울릉 태하 대풍감에 서 있었다. 아까시 향기가 수평선을 노랗게 물들이는 걸 바라보며 울진 월송정에 앉아 있었다. 해물잡탕국수가 모락모락 끓는 포항 구룡포항에 퍼질러져 있기도 했고, 햇살과 물이 금빛 동색(同色)으로 흐르는 영덕 오십천에서 낚시도 했다. 신라의 달밤 아래 천 년 전 사람들의 미소가 연못에 비치는 경주 월지를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은, 그 선명한 장면들의 틈새마다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 ‘별 것 아닌 순간들’이 내 여행을 키운 ‘팔할의 바람’이었다.

지난봄 “만 그루 소나무 가운데”에 세워진 울진 월송정에서 초록빛 솔향에 몸을 씻을 때, 정자 앞 소나무 숲에 한 무리의 교인들이 돗자리를 깔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차를 아무렇게나 세워놔 경치를 망치고, 마이크와 앰프로 시끄러운 소음을 내 고요한 명상의 기쁨을 깨뜨리는 것이었다.

그 공해를 피해 월송정에서 내려오니, 나를 위로하듯 멋진 카페가 기다리고 있었다. 하늘을 향해 몸을 뻗어 올린 울창한 소나무 숲 속, 기와지붕과 모던한 통유리 건물이 옛것과 새것, 한옥과 양옥, 동양미와 서양미의 조화를 이루는 카페 ‘노바(NOBA)’다. 화이트 톤의 벽과 은은한 조명빛, 한옥식 나무 서까래가 어우러진 내부도 좋지만, 그곳이 매력적인 이유는 바깥에 있다. 야외 테라스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커피와 함께 피톤치드가 몸속으로 스며들며 불쾌함이 싹 씻겨나갔다. 내 몸속 나쁜 피와 불쾌감까지 깨끗하게 씻어준 그 한 잔의 커피에게 이제야 고맙다고, 늦은 인사를 보낸다.

영덕에서는 목은 이색 기념관으로 가는 길, 영해면 괴시마을의 고즈넉한 정취가 마음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었다. 그곳의 오래된 햇살에선 해금 소리가 나는 듯했다. 괴시마을을 걷다가 괴정(槐亭) 앞에 멈춰 섰다. 1766년 조선 영조 때 괴정 남준형 선생이 지은 정자다. 마당에서는 전통 활쏘기 체험이 한창이었다. 담장 너머로 그 광경을 엿보다가 활쏘기를 지도하던 영양남씨 괴시파의 어르신과 눈이 마주치는 바람에 나도 마당으로 가 활을 당겨 보았다. 지금도 내 몸엔 그날 손끝에서부터 손목, 팔꿈치, 어깨로 이어지던 팽팽한 근육의 긴장이 새겨져 있다. 따사로운 봄볕 속에서 고요히 침묵하는 입술은 바짝 마르고, 머리칼을 한 올 한 올 세고 가는 섬세한 바람에 뺨이 부르르 떨렸다. 그때, 한 눈을 감고 바라본 세상은 참 아름다웠다. 몇 번 연습 끝에 과녁을 명중시키자 어르신께서 활짝 웃으며 박수를 쳐주셨고, 그제야 긴장이 풀리면서 내 온몸이 가벼워졌다.

 

포항 환호동 ‘커피명가’ 테라스에서 바라본 영일만 야경.
포항 환호동 ‘커피명가’ 테라스에서 바라본 영일만 야경.

포항에는 뜻밖의 ‘밤의 카페 테라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 아귀찜’에서 아귀간수육과 아귀찜을 배불리 먹고 숙소로 들어가던 길, 모던풍의 레스토랑과 카페들이 밀집해 있는 환호동 카페거리의 불빛에 매료되어 아무데나 들어간 곳이 ‘커피명가’였다. 그곳 야외 테라스에서 영일만의 야경을 바라보며 갓 구워낸 빵과 커피, 아포가토 등 디저트를 즐겼다. 커피도 커피지만 페이스트리와 케이크 등 빵맛이 빼어났다. 깨끗하게 씻긴 달과 별과 어선의 불빛들이 수평선 빨랫줄에 나란히 걸린 밤, 음식 평론가 황광해 선생, 홍성식 기자와 마주 앉아 나누는 대화는 어둠이 푸르게 깊도록 좀처럼 지치지 않았다.

 

소나기 쏟아지던 경주 ‘황남고택’ 안뜰.
소나기 쏟아지던 경주 ‘황남고택’ 안뜰.

문무대왕릉과 감포를 지나 선덕여왕릉에 오를 때까지 경주는 내내 맑고 따사로웠다. 황남동에 도착하는 순간, 마른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나기는 이른 여름의 열기를 식혀주면서, 선덕여왕을 짝사랑한 천민 지귀처럼 혼자 애달파 끓는 내 가슴 열병을 달래주면서 시원하게 내렸다. 갑자기 내린 비에 황남동은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비를 피해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도 배낭으로 비를 막으며, 막기는커녕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뻑 젖으며 처마를 때리는 빗소리가 왁자지껄 웃음소리처럼 들리는 ‘황남고택’의 문을 열었다. 삐거덕거리는 문소리, 마당에는 벌써 물웅덩이가 요란스럽게 부서지고 있었다. 처마 밑에 겨우 비를 피하고 섰더니 그 집 주인 어르신께서 맨발로 달려 나와 마른 수건을 건네주셨다. 비에 젖은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낸 후 나와 어르신은 마주보며 웃었다. 경주는 그렇게 천년의 마음으로 나를 격하게 환영해준 것이었다.

이런 일들도 있었다. 해파랑길을 걷다가 갑자기 배낭의 어깨끈이 떨어져나가 당혹스러웠고, 시장 상인들끼리 드잡이하는 걸 구경하다가 버스를 놓쳤다. 지갑을 두고 와 밥값을 외상으로 치르기도 했다. 경주 보문단지에서 빌린 전동스쿠터가 방전돼 손으로 낑낑 밀면서 간 적도 있다. 그때는 별로 대단한 사건들이 아니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참 잊히지 않는 장면들이다. 늘 환하게 켜져 있어서 빛이 빛인 줄 모르는 사이, 사소하기에 특별한 순간들이 여행을, 우리의 삶을 가로등처럼 밝혀준다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겠다.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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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2019-11-23 08:49:29
안녕하세요. 이병철입니다. 편집 기자님께 드리는 댓글입니다. 이 연재글이 현재 '오피니언 - 칼럼' 카테고리에 있습니다. '기획 특집 - 시인 이병철의 경북 바닷길 537km 그 맛과 멋' 카테고리로 옮겨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