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1989년 11월 9일 동서 베를린을 차단한 장벽이 무너진다. 1961년 이후 28년 만의 일이다. 유라시아 동쪽의 냉전 상징이 휴전선이라면, 서쪽의 상징은 베를린 장벽이다. 베를린 자유대학에 다니던 나는 장벽붕괴를 실시간 경험한다.

유고슬라비아 공용어인 세르보-크로아티아어를 제3슬라브어로 배우던 나는 담당강사 우베 힌리히스 교수와 서베를린 중심가 쿠담에서 역사적인 장면을 대면한다.

“오늘 저녁에 특별한 일 있어요?” “아니, 없는데요.” “그럼 나하고 시내 나가서 동베를린 사람들과 이야기해 볼래요?!” “그러죠.”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난 다음 쿠담으로 나간다.

거리 곳곳은 이미 흥분과 환희의 물결이 넘치고 있다. 여기저기 무리를 지어 다니며 큰소리로 떠드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이윽고 우리 일행은 큼지막한 레스토랑에 들어선다. 그리고 우베는 동베를린 사람들을 모아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자, 오늘 술값은 내가 냅니다. 자유롭게 마시면서 얘기해봅시다.” 그렇게 우리는 왁자지껄 끝없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자신을 1961년생이라 밝힌 젊은 친구는 장벽 붕괴 이후 동서 도이칠란트의 재통일과 게르만족의 융성을 염원하는 발언을 남긴다. 왜 당신들은 ‘섹스 숍’에 몰려다니느냐는 물음에 ‘동베를린에는 없어서’, 하는 답이 돌아온다. 40도짜리 독주와 맥주를 섞어 마시면서 나는 휴전선이 무너지고 남북한이 하나 되는 날을 상상한다.

장벽설치 이후 5천여명이 장벽을 넘고, 5천여명이 체포되고, 200명 가까운 사람이 사살된다. 동과 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갈라놓은 거대한 콘크리트 장벽이 무너져 내릴 것이라고 상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과 자주적인 외교방침, 소련의 재건과 개방정책을 들고 나온 고르바초프의 등장, 동구 사회주의 국가들의 동요, 미소군비경쟁 종언 같은 사건들이 맞물리면서 장벽은 서서히 하지만 근본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한다.

1990년 10월 3일 두 개의 도이칠란트가 하나로 재통일된다. 장벽이 무너지고 불과 1년 지나지 않아서 동서가 하나로 합쳐지는 장면은 극적이라 해도 무방하리라. 그러하되 동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마르크스와 엥겔스 동상에 쪽지가 나붙는다. “우리는 아무 잘못이 없어요(Wir haben keine Schuld)!” 충격적인 사건으로 기억한다. 사회주의 진영의 선두주자가 저렇게 속절없이 무너지다니! 가늠하지 못한 사변이 ‘도둑처럼’ 찾아온 것이다.

제2차 대전을 일으킨 당사자도 냉전과 분단을 극복하고 재통일하는데, 악랄한 일제의 식민통치와 대동아전쟁의 피해자인 한반도의 남과 북은 여전히 갈등과 대립을 진행한다. 작은 일 하나도 큰 나라 눈치 봐야하는 나라꼴도 안타깝지만, 역사의식 없는 전임 대통들을 생각하면 울화가 치민다. 그나마 돌아가던 금강산관광과 개성공단마저 폐쇄해 버린 어리석은 자들! 언제 우리는 휴전선을 무너뜨리고 하나가 되려는가?!

분단극복은 공염불이 아니라, 작은 손길 하나 마음 하나에서 시작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