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로 죽음과도 맞바꿀 맛일까

복어.
복어.

복어에 대한 지나친 찬사는 죄다 소동파(1037~1101년) 탓이다. 우리가 복어를 오해하는 부분도 마찬가지. 소동파 탓이다.

“복어살은 서시유(西施乳), 서시의 유방처럼 부드럽다”고 ‘소동파가 말했다’고 전해진다. 엉터리다. 복어살은, 서시유 즉, 서시의 유방이 아니다. 빙허각 이씨(1759∼1824년)가 ‘규합총서’에서 이 부분을 정확하게 밝혔다. “이리(白卵)는 옛날에 ‘서시유’라 했다. 이리를 생선 배에 넣고 실로 동여 뭉근한 불로 두어 시간 끓여 먹어라, 제대로 만지지 못하면 이리가 터져 국물이 뿌예진다”라고 했다. 암놈의 알, 난소는 독극물 덩어리다. 먹으면 바로 죽는다. 수컷의 정소는 먹을 수 있다. 복어 마니아들이 “단골들에게 몰래 주는 진미”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복엇국을 끓이는 과정에 정소가 터지면 국물이 뿌예진다. 그게 마치 ‘액체 젓’ 같다. ‘서시의 유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와전된 것이다.

소동파가 복어를 진미로 여겼음은 분명하다. 동파는 시, ‘혜숭춘강만경(惠崇春江晩景)’에서, “물 쑥은 땅에 가득하고 갈대 싹은 짤막하니, 지금이 바로 하돈이 올라오려는 때로다[正是河豚欲上時, 정시하돈욕상시]”라고 하였다(소동파시집_권26).

‘하돈’은 복어다. 소동파만 유별나게 복어를 진미로 여기지는 않았다. 소동파보다 앞선 시대 사람인 송나라 매요신(梅堯臣, 1002~1060년)도 복어 찬사를 시구로 남겼다. 내용은 소동파의 시와 비슷하다.

복어 손질하는 모습.
복어 손질하는 모습.

“봄 물가에 갈대 싹 나오고, 봄 언덕에 버들개지 난다/하돈이 이때를 만나면, 귀하기가 생선, 새우에 비교하랴?[貴不數魚鰕, 귀불수어하] (하략)”(‘범요주좌중객어식하돈어’ 중)

매요신의 시가 오히려 복어 맛을 더 강조하고 있다. 매요신은 소동파보다 30년 정도 앞선 시대 사람이다. 소동파만 복어를 별미로 여기지는 않았다.

소동파의 ‘죽음과도 맞바꿀 맛’이란 설명도 과장되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복어에 대한 ‘과장’은 일본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은 바쿠후 시절, 복어 식용을 금지했다. 역시 독 때문이다. 오랫동안 혼슈 서쪽이나 규슈 지역에서만 먹었던 복요리는, 근대에 들면서 일본 전역으로 퍼진다. ‘복어 명산지’는 시모노세키였다. 일본 메이지유신 주인공들이 중앙 정계에 진출하면서 일본 전역으로 복요리를 전파했다는 ‘설’도 있다.

복어 맑은 탕으로 끓이기 직전의 모습.
복어 맑은 탕으로 끓이기 직전의 모습.

복어를 두고 유난을 떠는 것은 일본이다. ‘복어 전문 조리사 자격증’을 처음 만든 것도 일본이다. 일본 에도[江戶] 시대 하이쿠 시인이었던 고바야시 잇사[小林一茶, 1763~1828년]는 “(복어 독이 무서워) 복어를 먹지 않는 바보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후지산”이라는 글을 남겼다. 만화 ‘맛의 달인(일본 이름, 美味しんぼ)’의 우미하라 유우잔의 모델은 실존 인물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魯山人, 1883~1959년)이다. 로산진은, “복어야말로 최고의 미식 중 하나라고 나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는 복어는, 프랑스의 푸아그라나 달팽이 요리와도 비교할 수 없다고 했다. 시모노세키 복어가 가장 맛있다거나, “독이 무서워 복요리를 못 먹게 하는 것은 엉터리”라는 말도 로산진이 남겼다(‘무타협미식가_로산진’, 김유 역. 허클베리북스, 2019)

우리는 복어를 두고 요란을 떨지는 않았다. 조선 시대 여러 기록에는 “복어가 각별히 맛있다”는 내용과 “독이 강하니 먹지 말자”는 내용이 뒤섞여 있다. 대표적인 ‘복어 식용 반대론자’가 청장관 이덕무(1741~ 1793년)다. 청장관의 ‘복어 식용 반대’는 뿌리가 깊다. 할아버지, 아버지 대부터 복어 식용을 반대한다. 단순히 반대한 것이 아니다. 후손들은 복어를 먹지 말라는 내용을 유훈으로 남겼다. 강계부사를 지낸 할아버지 부사공 이필익도 마찬가지.

(전략) 왕고(王考)인 부사공(府使公)의 유훈에, “백운대(白雲臺)에 오르지 말고, 하돈탕(河豚湯)을 먹지 말라” 하였는데, 우리 제부(諸父)들이 그 유훈을 삼가 지켰고 나의 형제들 대에 와서도 역시 지킨다. 이 두 가지로 미루어 보면 위험한 곳에 가서는 안 되고, 먹는 일로 생명과 바꾸어서는 아니 된다. (후략) (청장관전서_사소절_근신)

‘왕고’는 할아버지 이필훈이다. 할아버지의 유훈을 아버지, 숙부 대에 지켰고, 청장관 항렬에서도 지킨다고 했다. “먹는 일로 생명을 바꾼다”고 할 정도로 복어 독은 치명적이다.

청장관의 아버지인 통덕랑 이성호도 마찬가지. ‘청장관전서_아정유고 8권_부록_선고부군(先考府君)의 유사(遺事)’의 내용이다.

복어껍질 무침.
복어껍질 무침.

(전략) (아버지 통덕랑 이성호는) 평소 술을 즐겨 마셨는데 관직에 종사하고부터 술을 끊고 말씀하시기를 ‘마시면 과음하기 쉽고 과음하면 반드시 일을 그르친다’ 하였다. (중략) 흡연(吸煙)을 가장 싫어하고 하돈(河豚)을 들지 않았다. 항상 하돈 먹는 사람을 경계하기를 ‘어찌 구복(口腹)을 채우기 위하여 생명을 망각하랴’ 하였다. (후략)

‘구복(口腹)’은 입과 배다. 맛있게 먹거나 배를 채우려고 생명을 망각하는 일은 하지 말라는 뜻이다. 청장관 이덕무는 할아버지, 아버지의 이런 유훈을 잘 지켰고 자신도 ‘복어 경계’를 글로 남겼다.

이삼 월 사이에 어선(漁船)이 강에 정박하면 하돈이 왕왕 나타나므로 (중략) 먹고서 중독되어 죽는 자가 자못 많다.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니 어찌 그리 어리석단 말인가. (중략)/하돈(河豚)에 혹하는 자들의 말은/맛치곤 천하에 제일이거든/(중략)/어허! 백 년이 다 못 차는 몸/잘 죽어도 오히려 서글플 텐데/어쩌자고 독소를 마구 삼키어/가슴에다 칼날을 묻으려 드나/잠깐의 기쁨이야 얻겠지만/끝내는 목숨이 끊어지는 걸/(후략) (청장관전서 제1권_영처시고_하돈탄 병서)

복어 맑은 탕.
복어 맑은 탕.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복어를 먹었다. 장유면 수가리의 신석기시대 패총에서 졸복 뼈가 출토되었다. 김해는 통영에서 멀지 않다. 두 곳 모두 남해안이다. 지금도 통영 일대는 ‘졸복탕’ ‘졸복국’이 유명하다. 기록이 없을 뿐이지 삼국시대, 고려 시대에도 복어는 널리 먹었다.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1328~1396년)도 복어 예찬을 남겼다. 조선 초기에도 합포(마산)에서 복어 독 중독으로 집단 사망 사건이 발생했다.

조선 시대 기록에는, 청장관 이덕무나 청장관 선조들의 ‘경고’와는 달리, ‘복어 맛 찬미’의 내용도 무수히 많다.

겸재 정선(1676∼1759년)은 1740년부터 5년간 양천현령을 지냈다. 지금의 서울 양천구 언저리다. 이때 겸재가 남긴 그림이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그중 한 장이 지금의 행주대교 일대를 그린 ‘행호관어(杏湖觀漁)’다. ‘행주대교 부근에서 물고기 잡는 그림’이라는 뜻이다. 이 그림에는 겸재의 친구인 사천 이병연(1671∼1751년)의 시가 붙어 있다. “늦봄의 복엇국이요/초여름의 위어회라/복사꽃 넘실넘실 떠내려오니/그물을 행호 밖으로 던진다”는 내용이다.

복어 철은 복숭아 꽃이 떨어져서 강물로 내려올 때다. 소동파나 사천 이병연의 복어 모두 ‘복사꽃’이라는 공통어가 있다. 봄날 혹은 늦봄의 복어다. 두 사람의 복어는 황복(黃鰒)이다. 황복은, 바다에서 살다가 봄철에는 산란을 위해 강으로 거슬러 온다. 중국이나 우리나라 서해안 모두 황복의 명산지였다. 생선 잡는 도구가 발전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얕은 바다나 강으로 접근하는 복어를 잡았다. 황복이다. 소동파나 조선 시대 문인들이 이야기한 ‘복사꽃 필 무렵의 복어’는 당시에도 비교적 잡기 쉬운 황복이었다. ‘복어=복사꽃 필 무렵’은 황복이다. ‘황복 1kg가 100만 원’이라는 말이 떠돈다. 황복이 그 정도로 맛있을까? 아니다. 황복이 사라지니 희귀성 때문에 생긴 말이다.

대부분 복어는 겨울이 제철이다. 우리가 별미로 치는 검복, 자주복, 참복 등은 추운 가을부터 한겨울, 봄철까지가 제철이다. 까치복도 늦가을이 제철, 동해안의 복어 역시 겨울이 제철이다. 겨울철 복어에도 이리는 있다. 물론 충분히 맛있다. /맛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