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가 앨런 포우 ‘검은 고양이’

에드가 앨런 포우(1809∼1949)는 미국 단편소설의 선구자로, 미스터리와 환상, 과학소설 양식을 창조한 역사상 가장 독특한 작가였다.

순간, 어두워진 스크린 속에서 눈으로 보기에도 끔찍한 존재가 튀어나온다. 공포영화의 한 장면이다. 시각적 이미지를 직접적으로 다루는 영화는 이렇게 끔찍한 존재에 대한 두려움을 눈앞에 즉각적으로 소환한다.

이처럼 지금 시대에 공포라는 감정은 마치 영화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된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무엇이든 상상하는 것을 만들어낼 수 있게 된 시대의 영화는 우리의 상상적 영역 내에만 존재했던 기괴한 대상들을 우리 눈앞에 가져올 수 있다. 끔찍한 범죄나 괴물, 비인간적인 존재들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그렇게 우리의 현실과 공존한다.

하지만 공포는 감각적 재현만으로 촉발되는 감정만은 아니다. 그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한 상상과 관련되어 있다. 지금은 마치 그 자리를 호러나 스릴러 영화에 내준 듯 보이는 공포의 영역을, 이전 오랜 기간 동안 점유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문학이었다.

사실 지금 이 시점에 생각해 보면, 공포라는 감정이 과연 언어로서 매개될 수 있을까 하는 회의적인 의문이 찾아온다. 세계와 언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시기에는 기괴하고 끔찍한 대상을 언어로 묘사하는 것만으로 공포를 자아내게 마련이었다. 과거에라면 살인하는 인간의 상황을 전달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공포가 생겼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공포를 매개하는 감각적 재현이 우세한 때라면 어지간히 공포스러운 장면에 대한 묘사는 우스워 보일 뿐이다.

분명 감각적으로 재현될 수 있는 공포와 문학적 공포는 그 궤를 달리하는 것이 틀림없다. 예를 들어 보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라게 되는 미지의 기괴한 형상에 대해 우리가 갖는 감정이 바로 감각적 공포이다. 엄청나게 큰 거미를 보고 깜짝 놀라 끔찍한 느낌이 드는 것이 그것이다. 주로 인간의 형상과 관계되어 있지 않은, 인간적인 요소로 규정되지 않은 대상에 대해 공포의 감정이 솟아난다. 역으로 말한다면, 인간성에 대한 규정의 바깥에서 드러나는 대상에 대해 공포의 감정이 생긴다. 그러니 더더욱 끔찍한 대상을 그려낼 수 있게 된다면, 감각적 공포는 극대화된다.

이에 비해 문학적 공포는 좀 더 느리게 찾아온다. 예를 들어, 에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는 사실 지금 보면 그다지 공포스러운 소설은 아니다. 그 속에는 피가 튀는 장면에 대한 구체적인 묘사도, 기괴한 존재에 대한 공포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술에 빠진 어디에나 있는 인간과 고양이가 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자신이 기르던 고양이 플루토의 눈을 도려내고 그를 죽인 뒤 불의의 화재를 겪고 나서 곤궁한 생활에 술까지 마시며 피폐한 생활을 한다. 그러다 그는 우발적인 사고로 아내까지 죽이게 된다. 그는 죽은 아내의 시체를 지하실의 벽 속에 숨겼는데, 그가 아내를 죽일 무렵, 그의 주변에는 그가 죽였던 플루토와 비슷하게 외눈박이의 고양이가 그의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결국, 이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아내의 실종을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나’의 집 이곳, 저곳을 수색하다 결국 찾지 못하고 떠나려는 찰나, 나는 자만심과 광기에 지하실의 벽을 보란 듯이 두드리고, 아내와 함께 묻혀 있던 고양이의 기괴한 울음소리 때문에 나의 범행은 발각된다.

문학적 공포의 대명사가 된 이 작품의 공포는 그리 즉각적이지 않다. 공포를 일으키는 스펙터클을 구성하지 않는다. 아마 독자는 이 소설을 읽고 난 뒤인 어느 순간, 나를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을 바라보는 순간, 공포의 감정으로 스산한 느낌이 들게 될 것이다.

어쩌면 이 작품에서 고양이의 울음은 실제의 그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것은 인간이 마음 깊숙하게 존재하는 심연을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죄책감의 소리였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문학적 공포는 서서히 나를 덮쳐 오싹한 상상의 세계로 이끈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