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룡 서예가
강희룡 서예가

인조실록(仁祖實錄)에 ‘왕이 하교하였다. 옛날에 은(殷)나라 임금 수(受)가 극악무도하였지만 삼인(三仁)이 떠나버리고 나서야 나라가 망했다. 이를 보면 나라에 어진 이가 존재하는 것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고 가뭄에 비가 내리는 일에 비유할 정도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세 사람의 어진 이는 은나라 왕 주의 이복형 미자와 종실인 비간 그리고 기자를 가리킨다. 인조반정 후 집권한 서인정권은 반정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잠재우고 정국을 안정시키기 위해 남인계 인사 이원익(1547∼1634)을 영의정으로 발탁했다. 이원익은 인조의 부름을 받고 조정에 나갔지만, 광해군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자 이에 반대하여 광해군의 목숨을 구하였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도체찰사로서 세자와 왕을 호종했다. 그 후 노쇠함을 이유로 치사(致仕)를 청하다가 그대로 귀향하였는데, 인조는 그에게 다시 조정에 나와 주기를 이렇게 정중히 요청하였던 것이다.

내용을 더 살펴보면 ‘영부사 이원익은 선왕조의 훈구 대신으로서 충성과 정절이 크게 드러났으며, 청렴한 덕이 옛사람들보다 뛰어났으니, 진정한 이 나라의 대로(大老)이다. 그런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가서 마음을 돌려 조정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으니, 이는 과인이 무도하고 성의가 부족해서 그런 것이다. (중략)’

여기에 ‘대로’라는 말이 나온다. 이 대로는 단순히 나이가 제일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만인의 귀감이 되고, 시국을 꿰뚫어보는 혜안과 세상을 바르게 이끌 수 있는 경륜을 지닌 사람을 말한다. 이는 맹자가 주나라의 백이(伯夷)와 태공(太公)을 ‘천하의 대로’라고 말한 고사에서 나온 것으로,‘나라의 큰 어르신’이라는 뜻이다. 이원익은 오랫동안 벼슬살이하며 많은 업적을 남겼으면서도 두어 칸짜리 초가집에서 생활했고,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끼닛거리조차 없을 정도로 청빈했다고 한다. 그런 그를 인조가 대로라고 일컬은 것은 그리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지금 우리는 전례 없는 큰 갈등을 겪고 있다. 매사 이해관계에 따라 각 집단의 주장이 상반되고, 가짜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극단적인 대립을 거듭하고 있다. 모두가 내 주장만 내세울 뿐 다른 쪽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하지 않는다. 상대편을 동반자로 인정하지 않는 편향된 시각, 아집과 독선은 격렬했던 왕조의 당쟁시기보다 더 심해진 듯하다. 누군가 나서서 대국적인 해결책을 제시해 주기를 바라지만 사회 대통합은 고사하고 불신과 분열을 조장하여 손에 촛불을 든 사람들을 거리로 내몰고 있다. 국민의 주권행사로 위임받은 권력을 그들만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절대 권력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서 일어나는 상상의 한계를 넘는 각종 부정과 비리를 오랜 세월을 수없이 보아왔다. 위정자들의 권력 쟁취욕은 사회를 지역주의로 만들었으며 무소불위 정치권력과 경제가 야합을 하면서 언론까지도 결탁한 실상이 요즈음 우리 사회실상의 진면목도 드러냈다. 과거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거나 구성원들의 의견이 대립될 때면 집안이나 고을의 큰 어른을 찾아뵙고 고견을 들었듯이,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지닌 큰 어른의 말씀이 없어진지 오래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