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정(詩情)
가을의 시정(詩情)
  • 등록일 2019.11.07 19:05
  • 게재일 2019.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가을은 시정이 넘치는 계절이다. 매연과 소음과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서나 시적 정취를 자아내는 사물들을 만나게 된다. 숲길에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햇빛이 투과하는 영롱한 빛깔의 단풍잎과 그 사이로 내다보이는 에메랄드빛 하늘, 서늘한 바람이 불 때마다 나비 떼처럼 팔랑거리며 내리는 낙엽들, 마지막 생기를 다해 피어있는 가을 풀꽃들…. 가을의 단풍과 풀꽃은 화사하고 청초해도 어딘가 모를 우수 같은 게 배어있다. 머지않아 닥쳐올 한파를 앞둔, 그러니까 이별을 예감하는 표정이 엿보여서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계절엔 낙엽 지는 공원 벤치에라도 앉아 시집을 읽는 것도 멋과 낭만을 누리는 일일 터이다.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습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습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레미 드 구르몽 ‘낙엽’

가을이면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시다. 낙엽이 지는 가을에도 이 시 한 구절을 읊조려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정서가 메마른 사람일 것이다. 낙엽이야 한갓 무정물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묻어있다. 시몬은 여자의 이름이라는 것, 평론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구르몽은 물론 남자이고, 젊어서 얼굴에 난 상처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칩거하다시피 살았다는 것 등이 이 시를 따라다니는 일화다.

이 시를 옮겨 적기 위해 서가에서 찾아낸 시집은 1965년에 발행된 ‘잊으려도 못 잊어’라는 제목의 시선집이다. 장만영 시인이 각국의 유명 서정시들을 골라서 실었다. 이 시집에는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란 시도 있다. 가을이면 구르몽의 ‘낙엽’ 못지않게 애송되는 시다. 베를렌은 시인 랭보와의 비극적 결말의 동성애로도 유명한데, 그 때문에 아내와 자식이 떠나고 말년에는 침침한 뒷골목 습한 셋방에서 폐병을 앓다 죽었다고 한다.

“가을날/ 비오롱의/ 가락 긴 흐느낌/ 사랑에 찢어진/ 내 마음을/ 쓰리게 하네.// 종소리/ 울려오면/ 안타까이 가슴만 막혀// 가버린 날을/ 추억하며/ 눈물에 젖네.// 낙엽 아닌 몸이련만/ 오가는 바람따라/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이 몸도 서러운 신세.” -폴 베를렌 ‘가을의 노래’

가을은 이별과 추억과 우수의 계절이다. 보내야 할 것은 보내고, 그리운 것은 그리워하고, 쓸쓸히 혼자 걷는 것도 좋으리라. 아니면 단풍과 노을빛을 따라 불그레 취흥에 젖어 스스로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은 어떤가.

“가을볕에 불콰하게 산자락이 취했다./ 석양 하늘 지나가던 구름도 취했다./ 그 취기 따라가려고 술잔 거푸 기울인다.”-졸시 ‘단풍’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