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가을은 시정이 넘치는 계절이다. 매연과 소음과 사람들이 북적대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도 어디서나 시적 정취를 자아내는 사물들을 만나게 된다. 숲길에 들어서면 스테인드글라스처럼 햇빛이 투과하는 영롱한 빛깔의 단풍잎과 그 사이로 내다보이는 에메랄드빛 하늘, 서늘한 바람이 불 때마다 나비 떼처럼 팔랑거리며 내리는 낙엽들, 마지막 생기를 다해 피어있는 가을 풀꽃들…. 가을의 단풍과 풀꽃은 화사하고 청초해도 어딘가 모를 우수 같은 게 배어있다. 머지않아 닥쳐올 한파를 앞둔, 그러니까 이별을 예감하는 표정이 엿보여서 그런 것 같다. 아무튼 이런 계절엔 낙엽 지는 공원 벤치에라도 앉아 시집을 읽는 것도 멋과 낭만을 누리는 일일 터이다.

“시몬, 나무 잎새 져버린 숲으로 가자./ 낙엽은 이끼와 돌과 오솔길을 덮고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습은 쓸쓸하다./ 낙엽은 버림받고 땅 위에 흩어져 있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해질 무렵 낙엽 모습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상냥히 외친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발로 밟으면 낙엽은 영혼처럼 운다./….가까이 오라, 우리도 언젠가는 낙엽이리니./ 가까이 오라, 밤이 오고 바람이 분다.// 시몬, 너는 좋으냐? 낙엽 밟는 소리가.” -레미 드 구르몽 ‘낙엽’

가을이면 널리 인구에 회자되는 시다. 낙엽이 지는 가을에도 이 시 한 구절을 읊조려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도 정서가 메마른 사람일 것이다. 낙엽이야 한갓 무정물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인의 외롭고 쓸쓸한 마음이 묻어있다. 시몬은 여자의 이름이라는 것, 평론가이자 소설가이기도 한 구르몽은 물론 남자이고, 젊어서 얼굴에 난 상처 때문에 평생 독신으로 칩거하다시피 살았다는 것 등이 이 시를 따라다니는 일화다.

이 시를 옮겨 적기 위해 서가에서 찾아낸 시집은 1965년에 발행된 ‘잊으려도 못 잊어’라는 제목의 시선집이다. 장만영 시인이 각국의 유명 서정시들을 골라서 실었다. 이 시집에는 폴 베를렌의 ‘가을의 노래’란 시도 있다. 가을이면 구르몽의 ‘낙엽’ 못지않게 애송되는 시다. 베를렌은 시인 랭보와의 비극적 결말의 동성애로도 유명한데, 그 때문에 아내와 자식이 떠나고 말년에는 침침한 뒷골목 습한 셋방에서 폐병을 앓다 죽었다고 한다.

“가을날/ 비오롱의/ 가락 긴 흐느낌/ 사랑에 찢어진/ 내 마음을/ 쓰리게 하네.// 종소리/ 울려오면/ 안타까이 가슴만 막혀// 가버린 날을/ 추억하며/ 눈물에 젖네.// 낙엽 아닌 몸이련만/ 오가는 바람따라/ 여기저기 불려다니는/ 이 몸도 서러운 신세.” -폴 베를렌 ‘가을의 노래’

가을은 이별과 추억과 우수의 계절이다. 보내야 할 것은 보내고, 그리운 것은 그리워하고, 쓸쓸히 혼자 걷는 것도 좋으리라. 아니면 단풍과 노을빛을 따라 불그레 취흥에 젖어 스스로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은 어떤가.

“가을볕에 불콰하게 산자락이 취했다./ 석양 하늘 지나가던 구름도 취했다./ 그 취기 따라가려고 술잔 거푸 기울인다.”-졸시 ‘단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