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어가 사라진 이유는?

청어 과메기

지난 칼럼에서 청어, 꽁치 이야기를 썼다. 정확하게는 ‘관목’ ‘관목어’ ‘과메기’ 이야기였다. 여전히 사람들은 ‘청어 과메기가 원형’ 혹은 ‘원래는 청어 과메기인데 청어가 잡히지 않으니 꽁치 과메기로 대체했다’라고 말한다. 그간 잡히지 않던 청어가 슬슬 나타나고 있다. 왜 청어는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일까?

어린 새끼 솔치를 너무 많이 잡아서 개체가 사라지고 있는 걸까? 혹은 남획으로? 중국 배의 불법적인 노략질로 사라지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해류의 영향? 수온? 도대체 어떤 이유로 청어는 사라진 것일까?

청어는 오리무중이다. 청어 새끼는, 흔히, 솔치라고 부른다. 솔치는 대중적이지 않다. 솔치가 남획되어서 청어가 사라졌다고 말할 바는 아니다. 중국 배가 불법 어획? 조선 시대에 더 심했다. 청어는 조선 시대에도 오리무중이었다. 많이 잡혔다가 사라지고, 때로는 서해안에 나타났다가 동해안에서 많이 잡히는 일이 반복되었다.

조선 후기, 중국 배의 노략질이 지금보다 더 심했다. 평안도, 황해도 앞바다에 무시로 나타났다. 일부는 내륙까지 침범, 약탈, 부녀자 폭행도 서슴지 않았다. 중국 배라고 해서 ‘당선’이라고 불렀고, 정체불명의 배라고 해서 ‘황당선(荒唐船)’이라고도 불렀다.

힘이 약한 조선은 속수무책이었다. ‘대국’인 중국과의 외교 분쟁이 두려웠다. 정부가 확실한 방침을 정하지 않고 머뭇거리는 사이, 지방 관리들도 손을 놓고 있었다. 청어 등 수산물을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고 인명 피해까지 있었다.

‘승정원일기’ 고종 10년(1873년) 5월17일의 기록이다.

(전략) 상이 이르기를, “물고기는 어느 곳에서 많이 나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청어(靑魚)는 장연(長淵), 풍천(豆川), 옹진(甕津), 강령(康翎), 초도(椒島) 등지에서 많이 나고 석어(石魚, 조기)는 해주(海州)와 연평(延坪) 바다에서 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당선(唐船)이 바다에 들어와 고기를 잡는 곳이 어느 지역인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당선은 오로지 고기를 잡기 위해 오기 때문에 매양 장연 등 다섯 곳의 해양입니다.” 하였다. (중략) 상이 이르기를, “당선이 바다에 들어와 석어를 잡는가?” 하니, 서원보가 아뢰기를, “석어는 연평에서 나는데 당선은 본래 이곳에 와서 잡는 일은 없습니다.” 하였다. (후략)

 

청어로 만든 회. 겨울 동해안에서는 청어회가 비교적 흔하다.
청어로 만든 회. 겨울 동해안에서는 청어회가 비교적 흔하다.

이때 참찬관 서원보(1807년~?)는 67세, 정3품 당상관으로 황해도 관찰사 직을 거쳤다. 노신하와 갓 스무 살을 넘긴 젊은 국왕은 태평스럽게 “(황해도, 평안도 앞바다에서) 중국 배들이 청어잡이를 한다”고 말을 나눈다. 중국 등주(登州), 발해만 등에서 출발한 불법 중국 배들의 침탈은 심했다. 평안도와 황해도 해역은 무방비상태로 노출되었다. 중국 배들은 주로 청어를 챙겼다.

불과 9년 후인 1882년 11월27일(음력 10월17일). 더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우리와 중국 사이에 이른바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 맺어진다. 종주국 행세를 하는 청나라와 이미 무너진 조선 사이의 불평등 조약이었다.

조선은 1876년 일본과 이미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다급한 청나라가 임오군란(1882년 6월)을 빌미로 조선에 진출, 종주권을 행사했다. 청어와 관련하여, 기가 막히지도 않는 조항이 있다.

(전략) 조선의 평안도, 황해도와 청나라의 산동, 봉천 등 성(省)의 연해 지방에서는 양국의 어선들이 내왕하면서 고기를 잡을 수 있고, 아울러 해안에 올라가 음식물과 식수를 살 수 있으나, 사적으로 화물을 무역할 수 없다. (후략)

우리는 청나라 산동, 봉천 일대에서 물고기잡이를 할 수 있고, 청나라 어선은 한반도 평안도, 황해도 앞바다에서 생선잡이를 할 수 있다. 철저한 불평등이다. 불법을 합법으로 바꿨다. 발해만 일대나 중국 해안에서는 애당초 물고기가 잡히지 않았다. 중국 배들이 한반도 서해안까지 온 것은 청나라 바다에서 생선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 후기, 중국인들이 청어를 탐욕스럽게 대한 이유가 있다. 이 무렵 중국인들은 청어를 처음 만났다. ‘성호사설 제6권_만물문_청어(靑魚)’의 내용이다.

(전략) 지금 생산되는 청어는 옛날에도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해마다 가을철이 되면 함경도에서 생산되고 있는데, 형체가 아주 크게 생겼다./추운 겨울이 되면 경상도에서 생산되고 봄이 되면 차츰 전라도와 충청도로 옮겨 간다. 봄과 여름 사이에는 황해도에서 생산되는데, 차츰 서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점점 잘아져서 천해지기 때문에 사람마다 먹지 않는 이가 없다는 것이다./《징비록(懲毖錄)》에, “해주(海州)에서 나던 청어는 요즈음 와서 10년이 넘도록 근절되어 생산되지 않고 요동(遼東) 바다로 옮겨 가서 생산되는바, 요동 사람은 이 청어를 신어(新魚)라고 한다.”고 하였다./이로써 본다면 그 당시에는 오직 해주에서만 청어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 물고기 따위는 매양 시대의 풍토와 기후를 따라 다니기 때문에 요즈음 와서는 이 청어가 서해에서 아주 많이 난다고 하니, 또 저 요동에도 이 청어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후략)

 

잔뼈가 많지만 청어구이는 겨울철 별미다.
잔뼈가 많지만 청어구이는 겨울철 별미다.

청어에 대해서, “도무지 알 수 없다”고 표현한다. 서애 류성룡(1542~1607년)의 ‘징비록’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2년부터 1598년 사이를 기록했다. 1601년부터 썼다. ‘징비록’을 따르자면 16세기 말에는, 그동안 많이 잡혔던 청어가 황해도 해주 일대의 앞바다에서 사라졌다. 대신 청어가 전혀 잡히지 않았던 요동반도 앞바다에 나타났다. 중국인들은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생선이 나타나니 이름을 ‘새로운 물고기’ ‘신어(新魚)’라고 불렀다. 청나라 사람들은 ‘신어’를 잡으러 한반도 바다를 불법 침범한다.

성호 이익(1681~1763년)이 쓴 ‘성호사설’은 18세기 초반의 상황을 기록했다. ‘징비록’과는 약 120년 이상이 차이 난다. 이때도 성호 이익은 “(요즘은) 청어가 서해에서 많이 나는데, 요동반도에서도 아직 청어가 나는지는 알 수 없다”고 말한다.

청어는, 혼란스럽지만, 요긴한 생선이었다. 흔히 ‘조선의 4대 생선’으로 ‘청어, 멸치, 조기(석수어), 명태’를 손꼽는다. 청어를 두고 ‘종묘(宗廟)에 천신(薦新)한 귀한 물고기’라고 표현한다. 조선의 가장 귀한 곳이 왕실 조상을 모신 종묘다. 천신은 계절마다 새롭게 생산되는 산물들을 제단에 바치는 것이다. 그래서 귀하다? 틀렸다. 계절마다 새롭게 나오는 생산물들은 죄다 올렸다. 종묘에 천신한 것은 귀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흔했기 때문이다.

우리보다 더 청어가 흔했던 유럽 각국은 청어를 빌미로 전쟁도 일으켰다. 17세기, 네덜란드는 영국과 ‘청어전쟁’을 일으킨다. 영국 트롤선이 네덜란드 해역을 침범, 불법 청어잡이를 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부흥은, 북해에 나타났던 청어가 남하하여, 네덜란드 해역에서 많이 잡혔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냄새가 고약하기로 악명 높은 스웨덴의 ‘수르스트뢰밍(surstr·mming)’은 청어 절임, 청어 발효식품이다. 염장 청어를 통조림으로 만든다. 통조림 상태에서 끊임없이 발효, 숙성한다. 깡통이 부풀어 오르고 간혹 폭발하기도 한다. 스웨덴에서도 오래 묵은 수르스트뢰밍 통조림은 폭발물로 여긴다.

‘홀란서 뉴어 하링(Hollandse nieuwe haring)’은 네덜란드 전통음식이다. 매년 5월에서 7월 사이, 북해에서 잡은 햇청어로 만든다. ‘홀란서 뉴어 하링’ 중에서도 지방 함량이 가장 높은 6월 중순의 청어는 ‘코닝이네하링(Koningi nneharing)’이다. 청어 음식 중 최상급. ‘코닝이네’는 여왕을 의미한다.

지금도 청어는 네덜란드의 주요 산물이다. 매년 약 200억 마리의 청어가 ‘홀란서 뉴어 하링’으로 가공되며, 이중 약 8천500만 마리는 네덜란드에서 소비된다(두산백과).

동해안, 포항으로 청어가 돌아온다. 청어, 꽁치 따지지 않고, 과메기를 포함, 새로운 청어 요리, 꽁치 음식을 기대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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