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체 진솔 산림기술사사무소 대표

10월 28일 월요일이 밝았다. 지금으로부터 꼭 4년 전, 2015년 10월 27일부터 하루 한 줄씩 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날부터 시작해 오늘까지 ‘감사일지’를 쓴다. 부담없이 실천할 수 있기에 꾸준히 쓸 수 있었다.

2019년 한 해를 시작하면서는 매일 A4 한 장 쓰기를 결심했다. 글자 수 1천 자.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외근이 잦을 때는 힘들다. 늦은 시간 퇴근하면 글 쓸 에너지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쓴다. 업무, 일상, 관계 등 다양한 내용을 써서 블로그에 올린다.

지인 K도 글을 쓴다. 고등학교 동기들이 모이는 밴드에 정치나 일상을 소재로 글을 써 올리는데, 분량이 많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K는 새벽마다 쓴 글을 공유한다. K의 글에는 소신과 사명감이 묻어있다. 글을 보면 K의 철학과 인생관을 금새 알 수 있다. 얼굴 마주하고 소주 잔을 나눈 적 없지만, 지난 3년 동안 서로 글을 읽으며 정(情) 도타운 벗이 되었다.

‘사람’을 깊이 알아갈 수 있다는 장점 외에도 글쓰기는 몇 가지 매력이 있다. 글을 쓰는 시간만큼은 내 안에 거짓이 사라진다. 쓰는 행위는 자신과 대화를 나누는 시간이다. 솔직하게 표현한다. 내면의 모습을 만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진심으로 바라는 바는 무엇인지 깨닫게 해 준다.

글쓰기를 통해 치유 받은 경험도 적지 않다. 한번은 SNS에 내 주관이 뚜렷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바로 악플이 달리면서 약간 상처를 받았다. 괴로웠지만 어렵지 않게 치유할 수 있었던 것은 글쓰기였다. 악플을 단 사람 입장에서 글을 써 보았다. 글을 다 쓰고 나니 아픈 상처가 어느 정도 아물었다.

많은 이들이 글쓰기를 어려워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글쓰기가 부담스러웠지만 지금은 아니다. 누구나 편한 사람과는 거리낌 없이 말한다. 흔히 ‘수다를 떤다’고 표현한다. 수다를 떠는 순간은 어떤 부담감도 없다. 부담을 내려놓으니 물 흐르듯 말하기 쉽다. 글쓰기도 같은 윈리를 적용할 수 있다. 수다 떨 듯 내 마음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맞춤법이 틀리면 어떻고 문법이 좀 맞지 않으면 어떤가? 앞뒤 논리나 맥락이 어색해도 상관없다. 오로지 글을 쓰는 순간 떠오르는 것을 무작정 써내려 간다. 이런 방식으로 글을 쓰면 부담이 줄어든다.

양을 채우고 난 다음에는 마구 휘갈겨 쓴 초고를 수정한다. 글을 수정할 때도 남을 지나치게 의식하지 않는다. 다만 오타, 문맥이 어색한 곳만 수정할 뿐이다. 꾸준히 글을 쓰는 행위에 초점을 맞춘다.

지난 7월, 두 번째 책 <숲에서 길을 만들고 물을 다루다>를 출간했다. 본디 책 출판을 목적으로 쓴 글이 아니다. 숲에서 임도를 만들고, 사방 공사를 진행하며 현장에서 느낀 생각을 수시로 써서 온라인에 올린 것이 초고로 탈바꿈했다. 글이 하나 둘 모이다 보니 전국 각지에서 일하는 임업인들과 공유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책으로 묶은 것이다. 글을 쓸 때는 굳이 책으로 출간해야 한다는 부담을 내려놓는 것이 좋다. 그래야 글을 쓰는 동안 문장에 집중하게 된다. 자판을 두드리는 동안 내 문장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마음이 차분해진다.

말은 한번 입에서 나가면 돌이킬 수 없다. 하지만 글은 다르다. 수정이 가능하다. 말보다 느리긴 하지만, 그만큼 생각을 숙성시킬 수 있다. 말을 많아지면 가슴이 텅 빈 것처럼 허무할 때가 많다. 그 허전한 마음을 채워 주는 것이 바로 글쓰기다.

글을 쓰는 날에는 내가 살아 있음을 느낀다. 쓰지 않는 날은 공허하다. 문법과 맞춤법에 얽매이지 않는다. 문장의 모순을 무시하고 내 삶의 모순을 찾는다. 쓰는 만큼 내일이 달라진다. 삶의 방향을 짚고 나 자신의 가치를 읽을 수 있다. 글쓰기는 완벽이라는 허상을 버리고 완성이라는 성찰을 이루어 가는 도구다.

써 놓고 보면 글이 부끄러울 때가 많지만 포기하지 않고 매일 쓴다. 글쓰기는 ‘글쓰기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라는 나탈리 골드버그의 말을 믿는다. 언젠가 내 글의 전개와 논리적 서술이 나아질 것이라 확신하며 오늘도 글을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