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흉(埋兇)으로 왕자를 죽이다
매흉(埋兇)으로 왕자를 죽이다
  • 등록일 2019.10.29 19:20
  • 게재일 2019.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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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가선대부 박도창(朴道昌)의 가족들이 장기로 온 이유

영릉. 영조의 맏아들인 효장세자 진종(추존)과 그의 비 효순왕후 조씨의 능이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삼릉 묘역에 있다.

무신난(戊申亂·이인좌의 난)이 끝난 1728년 11월이었다. 영조의 외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홀연 세상을 떠났다. 그때 세자의 나이가 열 살이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730년(영조6) 3월, 궁궐 안에서 매흉((埋兇)의 흔적이 발견되면서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매흉이란 저주를 통해 왕과 세자 등 왕실의 가족들을 병들게 하거나 죽기를 바라는 뜻으로 흉한 물건을 일정한 곳에 묻는 것이고, 화흉(和兇)은 이 저주물들을 왕실 가족에게 먹이는 독살기도를 말한다.

과연 누가 이런 짓을 했을까? 추국(왕명으로 의금부에서 수행한 중죄인의 심문)결과 2년 전 무신난에서 피해를 본 소론과 남인 일파들의 짓임이 밝혀졌다. 이들은 궁녀들을 사주하여 궁궐 안 곳곳에 사람의 뼛가루와 흉물을 묻어놓았고, 그런 흉물을 음식물에 섞어 세자와 공주들에게 먹이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한 궁녀는 임금이 쓰는 뒷간부근 흙을 식칼로 판 뒤 저주의 말을 읊으면서 인골을 묻었다며 자백도 했다.

이 해괴망측한 사건의 내막을 파헤쳐 보면, 보통 사람의 상식과 도덕적 기준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

효장세자의 이름은 행(緈), 아명은 만복(萬福), 자는 성경(聖敬)이다. 1719년(숙종45) 2월 15일 영조와 정빈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정빈이씨는 동궁전 나인(內人)이었는데, 영조가 연잉군 시절 사가로 불러들여 첩으로 삼은 여인이다. 1721년(경종1) 8월 연잉군이 노론의 적극적인 지지로 왕세제가 되었을 때 정빈이씨도 내명부 종5품 소훈(昭訓)이 되었지만,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효장세자는 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남의 품에서 자란 것이다.

1724년(경종4) 영조가 즉위하면서 소훈 이씨는 내명부 정4품 소원(昭媛)에 추증되었고, 아들 이행은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1725년(영조1) 2월, 우윤 심정보, 예조판서 민진원이 경의군을 왕세자로 봉하자는 상소에 따라 영조는 경의군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그해 3월 20일 인정전에서 책봉례를 거행했다. 그때부터 효장세자는 일곱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서연(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하던 자리)에 참여하여 왕이 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효장세자는 아버지 영조를 빼닮아 스스로에게 매우 엄격했다. 1727년(영조3) 9월, 영조는 풍양조씨 가문의 이조 참의 조문명의 딸을 세자빈으로 맞아들였다. 그때 세자의 나이는 아홉 살이었고, 세자빈은 그 보다 세 살 위인 열두 살이었다. 세자빈 조씨는 성품이 온유하고 다정다감해서 시아버지 영조의 마음에 쏙 들었다. 똑똑한 왕세자와 착한 며느리를 바라보면서 영조는 당쟁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조정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행복은 길지가 않았다.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효장세자의 책봉에 관한 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책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효장세자책례도감의궤(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효장세자의 책봉에 관한 의식과 절차를 기록한 책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잠시 필름을 과거로 돌려보자. 1728년(영조4) 3월, 이인좌 등 남인과 소론 강경파들이 밀풍군 이탄을 옹립하며 반란을 일으켰다. 다행이 소론 온건파 계열(緩少系列)의 영의정 이광좌, 병조판서 오명항 등이 발 빠르게 대응하여 반란은 한 달여 만에 진압되었다. 영조는 당쟁이 국왕을 끌어내리려는 반란으로 비화하자 새삼 붕당의 폐해를 절감했다. 하지만 당쟁이란 것이 원래 정치에 대한 이견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긍정적인 측면도 많았다. 그래서 국왕으로서 이를 무작정 배척하기보다는 양자를 공평하게 등용하여 조정에 참여시키는 탕평책까지 구상했다.

한데 그해 11월, 효장세자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그달 16일 경복궁 자선당에서 세상을 떠난 것이다. 효장세자는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심지가 굳고 효성이 지극했다. 졸지에 믿고 사랑했던 후계자를 잃은 영조의 비통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임금이 자식을 잃고 애절하게 통곡하자 입시하고 있던 신하들까지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고 한다.

1729년(영조5) 1월 13일, 영조는 죽은 왕세자의 시호를 효장(孝章)으로 정했다. 지혜롭고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하고, 경건하고 신중하며 고상하고 현명한 것을 장(章)이라 했다. 효장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가례(嘉禮)를 치른 지 1년 밖에 되지 않은 세자빈 조씨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합방조차 하지 않은 상태에서 청상과부가 되어버린 것이다.

1730년(영조6) 봄바람에 아지랑이가 나부낄 3월이었다. 그러고 보니 효장세자가 죽은 지도 벌써 2년이 지났다. 영조가 궁궐 내를 산책하다가 우연히 여러 전각 근처에서 흉물이 묻혀있는 흔적을 발견했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영조는 바로 의금부에 조사를 명했다. 그 결과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소론 일당의 지시를 받은 궁녀 박순정, 김순혜, 무당 태자 등이 과부 이세정으로부터 건네받은 사람의 뼛가루를 창경궁의 양화당, 동궁, 빈궁의 침실 등에 묻었고, 예전부터 그것을 음식에 타서 왕세자와 강보에 싸인 네 명의 옹주에게 먹였다고 자백했다. 이를 먹은 화순옹주는 홍진과 함께 하혈 증세로 시달렸다. 영조는 비로소 효장세자의 죽음이 저들의 지속적인 매흉(埋兇)과 화흉(和凶) 탓임을 알게 되었다. 영조의 놀라움과 분개는 극에 달했다. 그달 9일자 <영조실록>의 기사에는 분개한 영조의 목소리가 가감 없이 실려 있다.


궐내에서 매흉과 화흉을 직접 행동에 옮긴 박순정은 효장세자를 두 살 때부터 일곱 살 때까지 보살폈던 최측근 궁녀였으니, 영조의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녀는 효장세자가 요양을 위해 거처를 옮겼을 때도 계속 따라다니며 독수(毒手)를 펼쳤다. 그녀가 세자에게 먹인 뼛가루의 재료는 대현산(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여러 무덤에서 채취했거나, 길가에 거적으로 말아놓은 개가 뜯어 먹다만 시체, 혹은 불에 탄 사람의 해골이었다. 끼니 때마다 그처럼 비위생적인 흉물을 섭취한 효장세자는 단기간에 위중한 상태에 빠져들었고, 병의 원인을 알 리 없는 의관은 그야말로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효장세자의 사인이 밝혀지면서 충격을 받은 영조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한동안 조용하던 조정에 피바람이 불었다.

사건 당일 영조는 대신들과 사헌부, 사간원, 의금부 당상, 좌·우포도대장을 불러들인 다음 새벽 3시에 국청을 열고 죄인들을 심문했다. 주모자 박순정과 이세정, 그들을 도와 궐내에 흉물을 묻거나 먹인 궁녀들과 여종들이 모조리 처형됐다.

조사가 진행될수록 이 사건의 배후 인물은 궁궐 밖으로 확대됐다. 가장 먼저 조사 대상에 오른 사람은 가선대부 박도창(朴道昌)이었다. 그는 무신난 이전에 강성파 소론계인 전라감사 황이장, 권첨, 정사효의 군관을 차례로 지내며 명성을 얻었고, 진휼을 잘해서 종2품 당상관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또한 박도창은 순천 방답진(防踏鎭)에 노비 수백여 명을 거느리고 있던 재력가였고, 장흥 등 바닷가 인근 읍의 뱃사람들과도 모두 친했으므로 따르는 세력들도 상당했다. 그와 공모한 자들도 있었다. 정사효의 첫째 아들 정도륭, 정사효의 둘째아들이자 여흥군의 매부인 정도중, 그리고 정사효의 서얼 동생 정사공 등이 박도창과 함께 이 일을 꾸민 것으로 밝혀졌다. 정사효는 전라도관찰사로 재임하던 중 무신난에 가담한 혐의로 국문을 받다가 죽은 인물이고,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가 지난 무신난에서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인사들이었다.

이 사건에서 박도창은 궁궐안의 사람들과 결탁하고 내통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는 여종 하복랑을 궁궐로 들여보내 궁녀들에게 뼛가루 등 흉물을 넘겨주었고, 소요되는 비용은 정도륭이 지원했다.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소론과 남인의 세상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노론을 제거해야 하고, 노론을 제거하려면 그들이 받드는 영조를 제거해야 했다. 바로 그 시작이 임금의 피붙이인 세자와 옹주들의 제거였다. 반란에 성공을 하면 양원군(성종의 15남)의 아들인 여흥군 이해(李垓)나 여릉군 이기(李圻)를 왕으로 추대하려는 계획이었다.

이 무렵 영조를 놀라게 한 또 한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엽기적인 매흉·화흉 사건의 수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던 4월 중순이었다. 19세의 어린 환관 최필웅 등 여러 명이 한밤중에 궁궐 담장을 넘어갔다가 체포된 것이다. 부쩍 의심을 품은 영조가 앞서 있었던 매흉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의심하여 엄중한 심문을 명했다. 심한 낙형(烙刑·불에 달군 쇠붙이로 피부를 지져 고문을 가하는 신문)을 견디지 못한 최필웅은 자신이 정사효의 일가붙이인 남인 박재창의 지시에 따랐다고 자백했다. 박재창이 일단의 노비들을 궐내에 잠입시켜 미리 구입한 화약을 터뜨려 불을 지르고, 궁인들이 놀라 뛰쳐나가면 자객 이태건이 임금을 죽이려 했다는 것이다. 연이어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은 같은 무리의 사람들이 일으킨 역모사건이었던 것이다.

경술년(1730) 이 해 이 두 모반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은 약 200명이 넘는다. 이들에 대한 조사는 1년 6개월 동안 계속되었다. 상궁, 환관 등 사건을 일으킨 직접 당사자들은 즉시 처형되었다. 그리고 무신난에서 용케도 살아남았던 정사효, 권첨, 목중형의 핵심 세력들과 그 이전에 김일경 상소에 동참했으나 영조의 배려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이진유, 윤성시, 서종하 등이 고문을 받다가 죽었다. 또한 무신년 당시 괘서사건에 관련되었다가 살아남은 나머지 인물들도 이 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지목되어 모두 처형되거나 신문을 받던 중 고문으로 죽었다.

 

장기읍성 성곽에 걸려있는 청사초롱. ‘장기유배문화축제’의 부대행사로 열린 달빛음악회에서 줄지어 내려다보고 있는 청사초롱의 행렬이 조선 500년 역사를 실낱에 꿰어 놓은 듯하다.
장기읍성 성곽에 걸려있는 청사초롱. ‘장기유배문화축제’의 부대행사로 열린 달빛음악회에서 줄지어 내려다보고 있는 청사초롱의 행렬이 조선 500년 역사를 실낱에 꿰어 놓은 듯하다.

아이러니하게도, 경술년에 일어난 이 두 가지 사건으로 영조는 자신의 정통성에 대해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였던 반대세력들을 뿌리째 제거할 수 있었다. 남인과 강경파 소론들이 바로 그들이었다. 이들은 영조와 노론에게 완전히 진압당하면서 재기불능 상태로 추락하고 만다. 수십 년에 걸친 남인· 준소((峻少)와 영조의 대결은 결국 영조의 완판승리로 끝이 났고, 한계를 여실이 드러낸 탕평정책도 막을 내렸다. 이후 정국은 노론의 일방적 독주로 전개가 되었다.

이 희대의 사건에 가담하였던 박도창은 심문도중에 독살을 당했다. 이런 일은 종종 있었다. 매질을 견디기 힘들었던 본인들의 뜻도 있었으나, 죄를 시인하게 되면 가족들은 연좌를 당하게 될 것이며, 가산도 지키기 힘들 것이라는 점을 염려한 집안사람들이 의금부 나장에게 뇌물을 주고 독약을 타 먹여 죽게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던 것이다.

박도창은 그렇게 죽었지만, 연좌된 첩 덕순(順德)과 첩의 아들 아지(阿只), 첩의 딸 영애(永愛)가 이 엄청난 사건의 뒷이야기를 짊어지고 장기현으로 유배되어 왔다. 그게 1730년 4월 29일이었다.

당쟁은 선악의 측면이 공존한다. 그 나름의 이념과 제도를 갖추어 적절하게 운영하면 사회발전의 수단이 될 수 있지만, 이것을 잘못 사용하면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키는 독약과도 같은 것이 된다. 어린 세자와 옹주들에게 무덤에서 파온 부패한 인골을 갈아 먹였다는 이 사실이 부끄럽게도 <영조실록>에 정사(正史)로 기록되어 있다. 당리당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당쟁의 폐해를 반면교사로 삼으라는 뜻일 거다. 당쟁은 시대적으로 계속되어 왔고 지금도 진행형이다. 다만 그 평가는 역사가 할 것이다. /향토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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