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하고도 흔했던 과메기

과메기는 술안주 뿐만 아니라, 반찬으로도 이용된다.

‘과메기’는 관목(貫目), 관목어(貫目魚)에서 시작되었다는 말은 ‘다수설’이다. 관목은 ‘눈을 꿰뚫었다’는 뜻이다.

‘정설’이 아니라 다수설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다. “관목어에서 과메기가 시작되었다”라는 명확한 기록은 없다.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몇몇 기록에서는 ‘관목’ ‘관목어’를 다르게 설명한다. 빙허각 이 씨(1759~1824년)의 ‘규합총서’에서는 “청어 두 눈이 말갛게 서로 비칠 정도가 되는, 신선한 것을 관목이라고 한다. 청어 2천마리에서 관목 한 마리를 얻을 정도로 귀하다”고 했다. 빙허각 이 씨의 ‘관목’은 싱싱한, 그래서 눈이 맑고 투명한 청어다. 우리가 아는, 말린 청어, 혹은 꽁치가 아니다. 과메기가 관목어는 아니다.

오주 이규경(1788~1856년)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의 ‘관목’은 빙허각 이 씨와 또 다르다.

“청어(靑魚)는 비늘 있는 물고기 중 가장 개체 수가 많다. (중략) 정조 무오, 기미년 간(정조 22~23년, 1798~1799년)에 다시 쏟아져 나오니 천해졌다. 조기[石首魚, 석수어] 정도로 크기가 작다. (동해의) 북쪽에서 시작하여 관동 바다를 따라 내려온다. 한겨울에 영남 울산, 장기(長耆) 등에서 잡히기 시작한다. 남쪽으로 내려올수록 크기가 작아진다. 어상(魚商)들이 멀리 한양으로 나른다. (중략)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연창(煙窓, 연기가 빠져나가는 창틀)에 매달아 훈제한다. 하여, 이름이 연관목(煙貫目)이다. [관목은 건청어의 속명(俗名)이다.](후략)”

‘만물편_충어류_어_용어’

관목, 과메기를 정확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이다. “관목은 말린 청어의 속명”이라고 못 박았다. 연관목은 재미있다. 연기 쐰 관목, 훈제 과메기다.

오주와 빙허각의 이야기는 명백하게 다르다. 한 사람은 말린 청어의 속명이 관목이라고 하고, 한 사람은 싱싱한 청어를 관목이라고 부른다.

두 사람 모두 18, 19세기를 살았던 실학자다. 오주는 물론이거니와 빙허각 이 씨 역시 실학자로는 명문 집안 출신이다. 빙허각은 친정, 시가 모두 실학자 집안이었다. 빙허각은 어린 시동생 풍석 서유구(1764∼1845년)를 가르쳤다고 전해진다. 같은 시대, 같은 공간에서 살았던, 학풍도 비슷한 두 사람의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청어와 꽁치, 어느 것이 과메기인가?

청어, 꽁치도 마찬가지다. 몇 해 전부터 “원래 과메기는 청어 말린 것이었는데, 최근 청어가 잡히지 않아서 청어 대신 꽁치로 과메기를 만든다”는 이야기가 떠돈다. 청어 과메기 이야기가 나오고 나서 포항, 구룡포 일대에서는 청어 과메기도 선보이고 있다.

청어 과메기가 원조? 일부 사실이나, 이 역시, 정확한 이야기는 아니다.

‘청어 과메기가 원형’이라는 표현은 과장이다. 원래 청어나 꽁치 모두 과메기로 만들었다. 날생선 유통이 어려웠던 시절이다. 냉장, 냉동 설비가 없었다. 생선을 말리거나 염장(鹽藏)이 보관, 유통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조기도 마찬가지. 날 것으로 옮기지 못하고, 말렸다. 굴비다. 명태도 그러하다. 겨울에 많이 잡히니, 추운 바람에 말려서 북어로 만들어 운반했다. 말리는 과정에서 발효, 숙성된다. 곰삭은, 좋은 맛은 덤이다.

등 푸른 생선은 쉬 상한다. 말리거나 염장을 해야 한다. 과메기나 젓갈 등이다.

청어가 많이 잡힌다. 공물 혹은 상품으로 만들어야 한다. 날것으로 옮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말려서 대도시로 옮겨야 한다. 말린 생선, 곧 과메기다.

꽁치도 마찬가지. 과메기로 만들었다. 어느 날부터 청어가 사라지니, 청어 과메기도 사라졌다. 꽁치 과메기만 남았다.

꽁치는 일제강점기 이후 많이 잡았다. 일본인들은 꽁치를 ‘추도어(秋刀魚)’ 혹은 ‘삼마(サンマ)’라 하고 귀하게 여긴다. 조선 시대에는 꽁치보다 청어가 대세였다. 청어는 구룡포, 장기 일대에서도 많이 잡았다.

왜 구룡포 과메기인가?

‘청어관목’ ‘구룡포 과메기’에 대한 재미있는 기록이 있다.

비슷한 시기, 두 종류의 문서다. 두 문서 모두 1798년(정조 22년) 10월에 작성했다. 200여 년 전이다. 지역도 비슷하다. 영일현(迎日縣)과 경주부(慶州府)다. 영일현(포항 남구 구룡포, 장기 일대)과 경주는 바다와 땅으로 맞닿아 있다. 같은 지역임에도 ‘과메기’에 대한 서술은 전혀 다르다.

먼저 ‘일성록’에 남아있는 경주 부윤(慶州 府尹) 오정원(吳鼎源)의 상소다.

정조 22년(1798년)10월 11일

(전략) 상소의 대략에, (중략) 연읍(沿邑)에 있는 해호(海戶)의 폐단은 교남(嶠南)이 가장 심합니다. 본주(경주)의 경우에는 진상하는 청어관목(靑魚貫目)과 건대구(乾大口) 등의 종류는 본래 토산(土産)이 아니기에 이전부터 인근 고을에서 사서 옮겨 왔고, 전복(全鰒)은 토산으로 채취하여 바쳤습니다. 수십 년 전부터는 몸집이 작고 색깔이 변질되었다는 이유로 감영으로부터 퇴짜를 맞아서, 다른 곳에서 사다가 바치게 되었는데 이것이 그대로 규례가 되었습니다. 오며 가며 사들이는 과정에서 해민(海民)들에게 폐단이 되고 있는데, 각종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호마다 수렴하는 돈이 도합 1800냥 남짓이나 됩니다. (후략)

교남은 영남이다. 경주부 ‘연읍’ 바닷가면 지금의 감포다. 청어관목과 건대구는 이 지역의 산물이 아니다. 인근 고을에서 사서 공납한다. 전복은 생산된다. 공납하는 곳은 경상좌도 감영이다. 퇴짜를 맞으면 다른 곳 생산품을 구해야 한다. 별도로 드는 돈이 엄청나다. 해민, 바닷가 사람들에게 큰 폐단이다. 생선 종류가 많지 않다.

같은 시기다.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영일 현감(迎日縣監) 정만석(鄭晩錫)의 상소다.

정조 22년(1798년)10월 13일

(전략) 영일현으로 말씀드리자면, 봉진하는 물선(物膳)으로 건광어(乾廣魚), 건대구(乾大口), 반건대구(半乾大口), 전복, 건문어(乾文魚), 관목청어(貫目靑魚), 분곽 등의 종류가 있으나 유독 본현에서 생산되는 전복은 크기가 작고 색이 거칠기 때문에 반드시 제주(濟州)에서 생산되는 것을 사 옵니다. 그런데 그 본가(本價)와 노비(路費)를 계산하면 첩(貼)당 소요되는 비용이 33냥이나 되는데, (중략) 좌도 연안의 여러 읍의 상황도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분곽은 미역이다. 생선 여러 종류가 토산품이다. 그중 구룡포나 장기 일대를 포함한 영일현의 산물로 관목청어를 든다. 오히려 이 지역은 전복이 말썽이다. 제주에서 생산된 것을 사 온다. 전복 1첩당, 전복값과 경비로 33냥이 든다.

같은 시기에 올린 상소문이다. 지금도 지척 간인 경주 바닷가와 포항 바닷가의 해산물이 다른 것이 흥미롭다.

울산부터 북쪽의 바다까지 청어는 잡혔다. 왜 청어 관목, 과메기는 지척 간인 경주 바닷가에서는 생산되지 않고, 포항 바닷가에서만 생산되었을까? 경주 부윤 오정원이 밝힌, 과메기를 사 오는 ‘인근 고을’은 울산 혹은 포항 구룡포, 장기 일대였을 것이다.

과메기, ‘바람’이 만든다

‘구룡포 과메기 생산’은 ‘바람’ 때문이었을 것이다. 영일 현감 정만석이 밝힌 ‘영일현 생산 해산물’은 건광어, 건대구, 반건대구, 전복, 건문어, 관목청어, 분곽(미역) 등이다. 7가지 중, 전복을 제외하면 모두 말린 해산물이다. 전복은, 생전복도 공물(세금)로 사용했다. 색깔과 모양이 좋지 않다고 했다. 모양, 색깔을 따지는 것은 생전복이다. 대구는 건대구와 반건대구로 상세히 나눴다. 굳이 ‘건복(乾鰒)’이라고 하지 않은 것은 생전복이다.

경주 부윤 오정원의 상소문 내용은 정반대다. 전복은 생산되는데, 청어관목과 건대구가 문제다. 관목, 과메기와 건대구는 모두 말린 것이다.

경주 바닷가와 포항 바닷가 해산물은 전혀 다르다. ‘바람’ 차이다. 구룡포 과메기의 바탕은 ‘바람’이다.

과메기의 역사는 깊다. 고려 말, 목은 이색 (1328~1396년)은 “쌀 한 말에 청어가 스무 마리 남짓으로 비싸다”라고 했다. 청어 스무 마리는 한 두름이다. ‘두름’은 ‘冬音(동음)’ 혹은 ‘冬乙音(동을음)으로 표기했다. 조선 중기 무신 정충신(1575~1636년)의 ’만운집‘에는 “곶감 1첩, 관목 4두름[貫目四冬音, 관목사동음]을 보낸다”는 표현이 있다. 곶감 100개와 과메기 80마리다. 과메기는 400년 전에, 선물로 보낼 정도로 귀하게, 그러나 한꺼번에 80마리를 보낼 정도로 흔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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