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약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는 성일가
2007년 영천 이주… 10여 년 추억 남겨
결혼 47주년 나무·장독대·원두막 등
그의 손길 여전히 곳곳에 남아 있어
자택에 건립 될 ‘신성일 기념관’도 기대
영화 기록 등 전시·체험 공간으로 꾸며

고(故) 신성일 배우의 영천시 괴연동에 위치한 성일가 정원에 그가 주연한 영화 스틸 사진들이 곳곳에 놓여져 있다. /김순희 시민기자

지난해 가을, 큰 별이 졌다. 배우 신성일의 타계 소식이었다. 오는 11월 4일이 영화로 우리에게 꿈을 심어주었던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년 되는 날이다. 마지막까지 거처했고 지금은 그의 영혼이 잠들어있는 영천시 괴연동은 어떤 모습일까. 그를 기리는 마음으로 성일가를 찾았다.

성일가는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 채약산 자락에 자리를 잡고 있다. 약초가 많이 나서 채약산이라 불렀다 하니 땅의 기운이 좋은 곳이다. 영천에 자리한 초등학교 교가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산이기도 해 풍수지리학적으로 명당임은 틀림없다. 그 산세의 푸른 기운에 얹혀살고 싶었던, 이젠 고인이 된 신성일의 등신상이 마당 가운데 서서 우릴 반긴다. 집 둘레에 벚나무가 몇 그루 서 있다. 2011년 결혼 47주년 기념으로 심었다고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신성일씨가 한 그루, 엄앵란씨가 한 그루, 자녀 셋의 이름이 각각 적힌 나무들이 그 옆을 지키고 섰다.

필자가 찾아간 날은 서늘한 기운을 재촉하는 가을비가 내렸다. 궂은 날임에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가을은 누군가를 그리워하기에 좋은 계절이다. 서서히 물들기 시작한 채약산 단풍은 그의 영화로부터 위로받으며 성장했던 이들의 발걸음을 재촉하기 충분했다. 거기에 당대 최고의 배우가 살던 곳이라는 엄숙함까지 더해져 이곳이 새로운 문화 관광 콘텐츠로서의 역할이 있을 가능성을 엿보게 해줬다. 살던 때는 제대로 된 진입로조차 없었지만 서거 1주기를 앞두고 길 만드는 공사가 한창이었다. 올 연말까지 그의 묘소가 있는 마당까지 길이 완성된다고 하니 반가운 일이다.

 

고(故) 신성일.  /한국화가 이철진
고(故) 신성일. /한국화가 이철진

2007년, 신성일씨는 영천으로 이주해 10여 년간 많은 추억을 남겼다. 하필 영천이었을까. 궁금했다. 그는 반백이 지나 정치생활을 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의 응원과 도움을 받았다. 그 중 한 사람이 이 마을에서 포도농사를 짓고 있었다. 그 농민은 말없이 많은 일을 해줬다. 신성일씨는 고마움을 전하러 찾아갔다. 마침 밭둑에서 참을 먹고 있었다. 신성일씨는 그 장면을 보고 잠시나마 쉴 수 있도록 원두막을 지어 선물 했다. 그 후 이 마을을 가끔씩 들렀던 신성일씨는 주변 산세와 분위기에 빠져 들었다. 마음마저 편안하자 아예 자신이 이곳에 터를 잡았다. 지금 성일가 마당가에 그 원두막이 옮겨져 있어 찾아오는 이들이 앉아서 마을을 내려다보기에 좋은 경치를 선물하고 있다.

성일가에는 여전히 그의 손길이 구석구석 뻗어 있다. 뒷마당에는 그가 담근 된장 고추장 단지가 도란도란 둘러앉아 주인의 손길을 기다리는 것 같다. 직접 음식을 만들어 드셨던 신성일 배우는 장을 볼 때면 마트보다는 시장을 자주 다녔다고 한다. 시장에 앉은 할머니들이 파는 과일과 채소를 주로 샀고 소박한 음식을 즐겨 먹었다니 소시민으로 살아간 그의 정겨운 면이 엿보였다.

신성일, 한 때 그 이름은 우리나라 영화의 상징 그 자체였다. 1960-70년대 전성기를 보내면서 수백 편의 영화에 출연한 신성일은 한국 영화사에서 그의 이름을 빼면 이야기가 안됐다. 1937년에 태어나서 2018년 11월 4일 새벽에 운명하였으니 한국 나이로 82세, 적지 않은 나이였지만 100세 시대를 맞이한 것을 감안하면 평소 건강하기로 알려진 그였기에 지병이 아니었다면 충분히 더 오래 살 수 있었으리라. 80세에 다다른 상황에서도 영화에 대한 의욕이 넘쳤던 터라 그의 암투병과 죽음은 많은 영화인들에게 깊은 슬픔을 안겨줬다.

신성일은 별 중의 별로 각인돼 있다.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노래만 들어도 ‘별들의 고향’이라는 제목이 떠오를 정도로 유명세를 탔다. 영화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남자배우로서는 거의 절대적이었다. 년 수십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그의 이름이 등장하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영화의 흥행도 달라질 정도였기에 앞 다투어 그를 출연시키려고 경쟁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다작을 하면서도 소모되지 않고 스타성을 겸비했던 불가사의한 ‘영화 청년’이었다. 국내 각종 영화상을 수상했고, 누구보다도 자유로운 영혼이었고, 평생 영화만을 생각하고 살았던 한국 영화의 역사 그 자체가 된 인물이다.

그는 생의 마지막 시간을 요양병원에서 보냈다. 거기서도 매주 한 번 ‘신성일 영화제’를 열고 자신이 출연한 작품들을 지인들과 함께 감상했다. 와병 중에서도 그는 직접 연기를 하기 위해 영화를 기획했었다. 주연은 신성일. 그러나 그는 작품을 연출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원래는 그 작품에서 사위 역할이었던 안성기를 신성일 역할로 해 놓았다고 한다. 그의 유작은 아직 진행 중이다.

 

지난해 추도식에 참석한 이철우 경북도지사와 최기문 영천시장은 고인의 꿈이었던 ‘신성일 기념관’을 건립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자택인 영천시 괴연동 성일가 내에 건립될 기념관이 벌써 기대된다. 고인이 보관해왔던 각종영화 관련 기록과 대본, 의상 등을 전시하고 체험해볼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질 예정이라고 한다. 고인의 생전 주거 공간인 한옥은 그대로 보존을 하고 서재로 쓰던 자리에 새로운 기념관 건물이 들어서는 방향으로 계획이 추진되고 있다. 둘레에 ‘성일로’라는 이름으로 그가 걸었던 길을 따라 등산로도 닦고 공연장도 들어설 전망이다.

기와가 얹힌 한옥 건물은 사람의 기운이 있으면 천년을 간다고 한다. 그가 떠나고 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으나 신성일 배우가 안방에서 곧 나올 듯 한 느낌이다. 문 곳곳에는 찾아온 사람들이 그의 생활이 궁금해서인지 구멍을 뚫어서 본 흔적이 있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를 아끼는 마음만 간직하고 조용히 둘러보고 갔으면 한다. 한국영화가 올 해로 100년을 맞았다. 곳곳에서 기념하는 전시회와 행사가 줄을 잇고 있다. 그 100년의 획을 그은 신성일의 기념관이 어서 빨리 건립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담아 돌아왔다.

 

“대배우 답지 않게 소탈했던 형님이셨죠”

신성일씨가 생전 영천에 오면 가장 많이 만난 이는 영천시장내에 살고 있는 정길락(70·사진)씨다. 신성일 배우보다는 13살 어리다. 성일가내 한옥을 지으면서 둘은 만났다.

“형님은 영화만 생각하며 살아온 터라 건축에 대해선 문외한이었죠. 그런 마당에 까다롭기 그지없는 한옥을 짓는다고 나서 처음에는 무척 고생을 했었습니다”

정씨는 “형님이 한옥 입주 때 환하게 웃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면서 생전에 성일가에 대해 큰 긍지를 가지셨다고 회고했다. 또 “대배우 답지 않게 소탈했었다”면서 가족처럼 지냈는데 너무 일찍 보내드려 마음이 아프다고 되뇌었다.

둘 사이의 정은 주변에도 알려져 있다. 멀리 출타했던 신성일씨가 영천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정길락씨가 있는 영천시장에 들러 얼굴을 보고 집으로 가곤 했다고 한다. 형제처럼 지낸 둘은 신성일씨의 또 다른 거처였던 서울 마포 아파트에 종종 함께 가서 며칠을 같이 지내기도 했다. 이는 엄앵란씨도 잘 알고 있는 일. 정길락씨는 “다가오는 기일에는 어떤 행사를 할 계획인가를 엄앵란 형수님께 물었더니 돌아가신 분의 뜻에 따라 가족과 가까운 친인척만 모여 취재진 없이 조용히 보내기로 했다고 한다”고 전한다. 정씨는 얼마 전에도 신성일 가의 잔디를 깎고 돌아왔다. 보고 싶을 때 한번 씩 찾아갔다 오면 마음이 편안하다고 했다. 말속엔 그리움이 짙게 배어있었다.

/김순희 시민기자

    김순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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