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욱시인
김현욱 시인

고3 때, 대학 진학을 앞두고 내 선택지는 국어국문학과와 국어교육학과로 좁혀졌다. 아이들이 있는 학교에서 일하고 싶었고, 학교에서 일한다면, 국어와 문학을 가르치고 싶었다.

당시는 수능과 내신, 논술이 대학 입시의 당락을 좌우했다. 수능과 내신 성적은 곧잘 반비례했다. 내신은 좋은데 수능이 나쁘거나, 수능은 좋은데 내신이 별로인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후자였다. 내신은 형편없었지만, 수능은 기대 이상으로 잘 나왔다. 글쓰기를 좋아해서 논술도 별 부담이 없었다.

존경하는 선생님을 몇 분 찾아뵙고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넌 교대를 가면 좋겠다.” 가정 형편, 성격, 특기, 전망 등을 종합한 선생님들의 애정 어린 조언이었다. 결국 나는 가까운 교대로 진학했다. 교대는 고등학교와 비슷했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여학생이 많다는 것뿐. 한동안 적응을 못해서 학사경고를 받으며 방황했다.

어찌어찌 졸업해서 고향으로 돌아와 교단에 섰다. 18년이 흘렀고, 그때 선생님들의 조언이 제자를 향한 깊은 애정에서 우러나왔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교대 진학해서 놀랐던 것 중의 하나는 동기들이 그동안 만났던 교사들에 대해 적대적이라는 점이었다. ‘인간’ 같지 않은 ‘선생’들이 많았다고 고백했다. 물론, 나도 그런 ‘선생’들을 만난 적이 있다. 촌지, 편애, 폭력, 권위, 방관이 횡행하던 시절이었다. 억울하게 심한 폭행을 당한 적도 있다. 하지만, 내 기억 속에는 아름다운 선생님들의 면면이 더 많다.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는 동구의 아픔을 다독여주는 박영은 선생님이 나온다. 가정사에서 비롯된 폭력과 억압 때문에 동구는 초등학교 3학년임에도 불구하고 글씨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난독증을 앓고 있다. 박영은 선생님의 따뜻한 사랑과 자상한 배려 덕분에 동구는 가족들 앞에서 선생님의 편지를 낭독하기에 이른다. 동구에게 박영은 선생님은 ‘영혼의 성장’을 이끄는 중요한 인물이다. 박영은 선생님이 없었다면 동구는 어떻게 되었을까? 동구의 아름다운 영혼의 정원은 더 이상 아름답지 않았으리라.

교사는 아이들의 영혼에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최근에 본 영화 ‘벌새’의 김영지 선생님, 그 유명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 키팅 선생님, 하이타니 겐지로의 동화 ‘나는 선생님이 좋아요’에 고다니 선생님과 아다치 선생님. 그리고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에 박영은 선생님. 이들이 책과 영화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아이들 마음속에 아로새겨진 아름다운 선생님도 많을 것이다.

입시철이다. 고3 조카는 최근에 면접을 열심히 보러 다닌다. 오로지 성적으로만 가늠해서 원서를 쓰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삶에서 중요한 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라고 한다. 의대에 입학했다가 자퇴하고 애니메이션 학과로 진로를 바꾼 학생이 그걸 증명한다. 자신을 잘 아는 아름다운 선생님들과 삶과 진로에 관해 이야기를 많이 나누었으면 좋겠다. 좋은 스승을 만나려는 준비가 되어있다면, 김영지 선생님, 박영은 선생님, 키팅 선생님, 고다니 선생님, 아다치 선생님들은 바로 여러분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