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이인좌의 난에 연좌된 사람들

1728년, 영조 4년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 이후 난에 연좌된 일가친족들이 장기로 유배를 왔다. 사진은 지난 11, 12일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서 열린 제1회 장기유배문화축제의 부대행사로 열린 유배문화 학술세미나 모습.  

영조가 왕이 된 지 4년째 되던 해인 1728년 3월, 당시 야당이었던 이인좌(李麟佐) 등이 정권 탈취를 기도하며 난(亂)을 일으켰다. 이 난의 특징은 사대부 양반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반란이란 점이다. 난이 평정되자 ‘유3천리’에 처해진 연좌인 10명이 각자의 사연을 짊어지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왔다.

골수 남인인 이인좌(34세)는 세종대왕의 11세손이었다. 선대 때부터 청주목 송면(松面. 괴산군 청천면 송면리) 일원에서 살고 있었다. 청천면은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을 제향한 화양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곳으로, 이인좌는 노론의 성지(聖地)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그들의 위세를 보며 자랐다. 이인좌는 남인이 축출된 1680년(숙종6) 3월의 경신대출척 때 서인에게 사사된 윤휴(尹鑴)의 손녀사위였다. 이런 태생적 여건으로 그는 노론이 집권할 당시에는 죽었다 깨어나도 입신(立身)이 어려운 처지였다. 더구나 1694년(숙종20) 갑술환국(폐비민씨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 이후 그를 포함한 일족들은 과거시험 응시조차 할 수 없는 폐족(廢族)의 신분이었다. 그런 그가 노론에서 추대한 영조를 인정할 수 없다며 세력을 모아 난을 주도한 것이다.

이인좌의 난은 전국적인 내란이었다. 그래서 그 명칭도 지방마다 다르다. 경상도에서는 거창의 정희량이 주도를 하였으므로 정희량의 난, 전라도에서는 태인현감 박필현이 주도를 했으므로 박필현의 난, 충청도에서는 청주일대의 이인좌가 주도를 했으므로 이인좌의 난이라고 한다. 또 누렁 원숭이의 해인 무신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그냥 무신란(戊申亂)이라고도 불린다. 이 난의 내막부터 진압과정을 살펴보면 영조의 탕평정치에 대한 노련한 한 수가 돋보인다.

왕이 되기 전 영조는 붕당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이 임금이 된 후에는 탕평책(蕩平策)을 본격적으로 외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영조의 탕평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를 왕좌에 앉히기까지 공을 들인 노론인사들이 가만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노론들은 지난 1721년(경종 1)~1722년 사이 왕통문제와 관련하여 소론이 노론을 숙청한 신임옥사에 대한 책임부터 묻고 나왔다. 가장 먼저 말문을 튼 이는 이의연(李義淵)이었다. 지난날 처형된 노론 대신들을 신원(伸寃)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너무 성급한 청이었다. 당시는 노론과 소론의 연합정권이 성립되어 있던 상황이었으므로 이의연은 오히려 소론의 반대에 부딪혀 귀양을 가야만 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노론들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다. 목호룡(睦虎龍)을 매수해 신임옥사를 주도한 김일경을 처벌해야 된다는 상소가 각처에서 연달아 들어왔다. 결국 영조는 김일경과 임인년 고변으로 공신이 된 목호룡을 잡아와 국청(鞫廳)을 열었다. 이들은 심문을 받다가 죽었다. 자신들의 정치적 후원자인 경종도 이미 죽었고, 어디 기댈 곳이 없었던 소론들은 이제 모두 제 얼굴빛이 아니었다. 천만다행인 것이 그래도 영조가 탕평을 고집하고 있는 것이었다. 영조는 김일경과 목호룡을 죽이면서까지 소론에 대한 탄압을 하면서도 소론의 이광좌를 영의정으로 삼았다. 되도록 붕당을 막아보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유배행렬 재현행사.
유배행렬 재현행사.

하지만 영조의 이런 정책에 맞서는 노론의 공격은 집요했다. 결국 영조는 신임옥사 때 노론4대신을 역적으로 몰아 죽이는데 앞장 선 이진유 등 여섯 명을 귀양 보냈다. 이어 영의정 이광좌, 우의정 조태억 등 소론대신들도 조정에서 내쫓고, 민진원과 정호(鄭澔) 등 노론세력들을 영입했다. 득세는 했지만 노론들은 영조의 솜방망이 처분을 못마땅해 했다. 귀양을 보낼게 아니라 이광좌 등 여섯 명은 반드시 참형에 처해야 한다며 계속해서 들볶았다. 참다못한 영조가 발끈했다. 노론 대신들이 무고와 모함에 의해 희생되었다는 사실들을 밝혔고, 원통한 것을 풀어줬으면 됐지 더 이상의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불러온다며 화를 내었다.

노론들은 승복은커녕 마치 난이라도 일으킬 기세였다. 화가 치민 영조는 영부사(領府事) 민진원, 우의정 정호 이하 여러 노론들을 파면하고, 2년 전에 파면했던 소론계의 이광좌·조태억 등을 다시 등용하여 정승으로 삼아버렸다. 정부요직도 소론들로 채워 넣었다. 졸지에 정국이 뒤바뀐 것이다. 노론은 복수에 너무 목메다가 오히려 자신들의 지위를 잃은 꼴이 되었다. 이 해가 정미년(1727)이기 때문에 이를 두고 ‘정미환국(丁未換局)’이라 한다.

영조의 이 정미환국이 바로 이듬해 일어날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신의 한 수’가 될 줄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당시 소론은 온건파인 온소(緩少)와 강경파인 준소(埈少)로 갈라져 있을 때였다. 영조와 공존을 추구했던 사람들은 소론 온건파들이었다. 정치적 지위를 위협받게 된 박필현 등 준소(埈少) 인사들은 갑술환국 이후 정권에서 배제된 남인들을 포섭해 영조와 노론을 제거할 계획을 짜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정미환국으로 소론이 정권을 잡자 반란 세력들의 의견이 분열되었고, 막상 반란이 일어나자 한양 세력들은 내응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다시 이야기를 되돌리자면, 무신란을 준비하는 세력들은 남인과 소론의 강경파들이었다. 이들은 난의 명분으로 경종이 영조에게 독살되었다는 의혹과, 영조는 숙종의 친 아들이 아니라는 것을 내세웠다. 난이 일어나기 1개월 전, 이들은 이런 내용이 적힌 괘서를 전국 주요 길목에 내걸며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을 왕으로 추대하고자 하였다. 단숨에 전국 각지에서 20여 만 명이 동조세력으로 가담했다. 그중에는 향리, 관군, 노비까지 다양한 계층이 포함되어 있었다.

기회를 엿보던 이들은 1728년(영조4) 3월 15일, 이인좌를 대원수로 삼아 합천 묘산에서 기병(起兵)을 하면서 반란이 시작되었다. 반군은 장례 행렬로 위장해 무기를 운반했다. 낮에 가까운 숲 속에 무기를 숨겨두었다가 밤이 되면 숨겨둔 무기를 들고 내응 세력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청주성을 점령해버렸다. 병영을 급습해 충청병사 이봉상 등을 살해하고 청주목 여러 읍에 격문을 보내어 병마를 모집했다. 관아를 점령한 후 백성들에게 곡식을 풀어 나누어주자, 전염병과 기근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이 살기 위해 반군에 가담했다. 경종을 위한 복수의 기(旗)를 세우고, 경종의 위패를 군중(軍中)에 설치해 아침저녁으로 곡배를 하면서 군사들을 뭉쳐나갔다.

영조는 이 반란에 큰 충격을 입었다. 소론에게 권력을 실어 주었는데도 소론의 일부 세력이 반란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황당한 일이었다. 더구나 왕위에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서 반란이 일어났으니 그 불안감은 더 컸다.

반군은 파죽지세로 청주에서 목천·청안·진천을 거쳐 안성·죽산으로 향하였다. 이들이 한양을 향해 북상할 때, 영조는 또 맞불작전에 들어갔다. 소론인 병조판서 오명항을 순무사(巡撫使)로 삼아 불로 불을 끄는 전략에 나섰던 것이다.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참여한다고 약조는 돼 있었던 소론계 인사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반군들에게 협조를 하지 않았다. 오명항은 오히려 이인좌의 첩자들을 역이용해서 유인전술을 펼쳤다. 반군이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일제히 공격했고, 반군은 수적 열세에 밀려 무너지기 시작했다. 만약 한양의 반군세력들이 안성·죽산전투에 참여했더라면 상황은 바뀌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배신으로 3월 24일 안성에 이어 죽산에서도 패한 이인좌는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했다. 안성·죽산에서 반군의 패보는 삼남 지방의 반군에도 큰 타격을 줬다. 오명항이 이끄는 관군이 청주를 거쳐 4월 초 추풍령을 넘어 남하했을 때에는 영남지방의 반군도 이미 지방관군에 의해 소탕된 후였다. 무신란이 17일여 만에 진압된 것이다.

영조는 난을 수습하는데도 직접 나섰다. 수많은 관련자 중 핵심자만 처벌하고 그들을 따라간 백성들은 처벌하지 말라고 명을 내렸다. <영조실록>에 무신란의 역적으로 기록된 사람은 총 642명이지만, 이중 62명만 극형에 처해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극형에 처해진 사람들의 재산은 몰수되었고, 연좌된 일가친족들은 모두 유배를 보냈다. 이때 이들의 친족 일부가 장기로 유배를 온 것인데, 그 일면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1728년 (영조4) 6월 21일 안찬서(安賛瑞)의 처 끗열(唜烈), 딸 연이(連伊)와 사매(士每), 아들 일기(日記)등 일가족 4명이 연좌되어 장기로 왔다. 이 집안의 가장인 안찬서는 이인좌의 군대에서 장수로 활동하다 역적으로 몰려 참형에 처해진 후였다.

이듬해인 1729년(영조5) 5월 20일에는 최용서(崔龍瑞)의 처 봉업(奉業)이 왔고, 6월에는 아들 최흥선(崔興先), 딸 최아기(崔岳伊)가 연좌되어 장기로 왔다. 가장인 최용서는 이인좌의 군대에서 용맹을 떨친 장수였다. 가장은 참형에 처했고 일가족 3명이 장기로 온 것이다.

8월 23일에는 울진현 주둔군(駐屯軍)에 노예로 공급되어 있던 조세추(曺世樞)의 동생 탈(梲)과, 유3천리 안치에 처해졌던 조카 조중휴(曺重烋)가 이배되어 장기로 왔다. 조세추는 문경에 기반을 둔 조하주(曺夏疇:1650∼1725)의 일족이었다. 조하주는 이인좌의 외할아버지인데, 처남이 성호 이익(李瀷)이다. 그는 남인으로 영남 제일의 부자였다. 남인의 핵심 축이었던 조하주 문중은 난에 가담하여 재정을 책임지는 등 큰 역할을 하였지만 이 난이 실패함으로서 역적가문으로 몰렸다.

청주 수암골 표충사. 이인좌의 난 때 순절한 인물들을 기리는 역사적 장소이다.
청주 수암골 표충사. 이인좌의 난 때 순절한 인물들을 기리는 역사적 장소이다.

난이 평정되고 17년이 지난 후, 새삼스럽게 장기로 유배를 온 사람도 있었다. 당시 조사에서 빠졌던 김덕삼(金德三)의 조카 3명이 숨어살다가 공홍(公洪: 공주 홍주) 감사에게 적발되었던 것이다. 공홍감사는 이를 의금부에 보고를 하였고, 의금부에서는 이들을 유3천리 안치형에 처했다. 이때 김덕삼의 조카 김동엽(金東曄)이 장기로 위리안치되었다. 김덕삼은 이인좌의 난에 깊이 개입하였다가 대역부도죄로 이미 1745년(영조21) 12월 18일 능지처사되었다.

이인좌의 난으로 영조는 즉위 초부터 주창한 탕평책의 명분을 더욱 굳힐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왕권강화와 정국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골육상쟁(骨肉相爭)의 비극이라고 할까. 무신란을 평정하는 데는 정미환국으로 등용된 소론 정권이 앞장섰으나, 난의 주모자 대부분도 소론이었다. 때문에 소론들의 피해가 만만치 않았다. 이후에는 노론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고, 소론은 재기 불능상태가 된다. 이 사건 이후 조정에서는 지방 세력을 억누르는 정책을 강화하게 되었으며, 덩달아 영남지역 선비들의 중앙정계 진출은 앞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게 되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