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목대구가톨릭대 교수
서정목 대구가톨릭대 교수

필자는 통번역학을 전공하였다. 그래서 통번역 업계와 업무를 잘 안다. 통역업무가 필요한 업체에서는 통역사를 부른다. 모신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대신 통역을 붙인다는 말을 쓴다. 과외 선생도 모신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과외선생도 붙인다. 변호사는 붙인다거나 댄다는 말을 쓴다. 존경받는 직업에는 아마 이런 말을 쓰지 않는 듯하다. 과거 변호사를 보고 칼 안든 강도라는 말이 유행했었다. 요즘이야 변호사를 비롯한 사짜 직업들의 수난시대이니 옛말이려니 한다. 그러나 대체로 검사, 판사, 변호사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는 않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검사와 재벌, 검사와 조폭, 그리고 이들을 돕는 변호사는 막장드라마 못지않게 단골 소재가 되었다. 이처럼 법조계는 대중들에게 그다지 호의적이고 친근하게 느끼는 직업군이 아니다. 이들이 대중들의 불신을 받는 것은 공정하게 법의 잣대가 적용되지 않은 때문이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은 디케(Dike)이며, 로마신화에서는 유스티시아(Justitia)이다. 유스티시아의 조각상은 한손에는 칼, 한손에는 저울, 그리고 눈에는 눈가리개를 하고 있다. 법을 심판하는데 있어 칼같이 저울질하되, 눈가리개로 눈을 가리는 것은 편견없이 공정하게 재판하라는 의미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법에 관한한 최고의 가치는 공정함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이를 잘 대변해 준다.

며칠 전 저녁, 한 TV 드라마에 놀라운 대사가 쏟아져 나왔다. “이 세상은 수많은 혁명을 통해 인간의 삶은 개선되어 왔고 앞으로는 더 좋아진다. 부딪히고 깨지고 엎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하는 것이 역사의 질서”라는 것이다. 그저 드라마 대사로 받아들이기로는 너무나 감동적이고, 무게감이 느껴지는 말이다. 권위주의 체제의 몰락과 민주화도 이러한 역사의 질서에서 이해될 수 있다. 우리나라도 그렇다. 서구에서 수백 년에 걸쳐 이룩한 민주화를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수많은 시민의 피와 땀을 바탕으로 민주화 투쟁을 통해 이루었다. 우리의 민주화는 시민들이 부딪히고, 깨지고, 엎어져도 다시 일어서면서 당면한 과제를 극복하여 온 역사의 질서인 것이다. 다만 경제적으로 압축 성장한 것처럼, 민주화도 압축해서 압축 민주화(!)를 이루다 보니 아직 덜 다듬어진 부분이 군데군데 남아있다. 검찰개혁, 사법개혁의 과제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역사는 인간을 위주로 인간의 삶에 유용하고 합리적인 방향으로 진보한다. 검찰개혁도 역사의 질서에서 보면 이루어져야 하는 수순이다.

한국인들은 평등의식이 강하다. 평등의식이 강한 한국이 자본주의 사회가 되고, 부를 숭배하고 부자를 존경하는 중국이 사회주의 사회가 된 것이 아이러니하다고 누군가 한 말이 떠오른다. 공정하지 않은 법의 적용은 평등에 위배된다. 그래서 시민들은 무소불위의 검찰권을 거부하고, 수사권과 기소권의 분리를 외친다. 민주화는 별 볼일 없는 보통 사람이 많이 사는 사회가 되는 과정이다. 함께 더불어 사는 이런 사회는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