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해방 이후를 거치며 오늘날의 천일염이 시작됐다
일제강점기·해방 이후를 거치며 오늘날의 천일염이 시작됐다
  •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 등록일 2019.10.21 19:51
  • 게재일 2019.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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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말까지는 ‘자염’이 일반적

전남 무안의 염전. 천일염 염전은 1907년 처음 시작되었다.
전남 무안의 염전. 천일염 염전은 1907년 처음 시작되었다.

소금 ‘SALT’에서 월급 ‘SALARY’가 파생되었다는 말은 정설이다. 소금을 빼고 인류 역사를 설명할 수는 없다. 고대 이집트 피라미드 노동자에게 반드시 소금과 마늘을 주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에이, 설마?”라고 하겠지만 한반도는 만성적인 소금 부족 지역이었다.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 대한민국 초기에 늘 소금이 부족했다. 1960년대까지 소금은 정부의 전매품(專賣品)이었다. 전매품은, 전매청 등 전매기관이 생산, 유통, 판매를 관리한다. 민간의 사사로운 소금 생산, 판매는 불법이었다.

소금이 부족하니 정부가 직접 소금을 관리했다. 담배, 인삼, 소금 등이 예전에는 모두 전매품이었다. 1950년대, 천일염 주요 생산지인 목포시청에는 염업과(鹽業課)가 있었다. 염업과에서는 불법적인 소금의 유통을 철저히 막았다. 소금 불법 유통이 드러나면, 불법 유통 소금 몰수, 벌금 때로는 형사 처분도 했다.

동아일보 1962년 3월13일자 2면의 기사 내용이다. 제목은 ‘상인 소금 사지 말라’다.

상인 소금 사지말라/전매청서 요망

전매청에서는 12일 鹽指定小賣所(염지정소매소)에서 배급하고 있는 소금 이외는 상인들로부터는 소금을 사지 말라고 전국의 수요자에게 요망하였다. 전국 소매소에 나가고 있는 소금은 118만여 가마니에 달하고 있다. 鹽田(염전)은 금년 5월부터 민영화되며 그때까지는 民間保有鹽(민간보유염)이 있을 수 없다.

앞서 밝혔듯이, 소금은 전매품이었다. 전매청이 관리했다. 전매청에서 전국의 ‘염지정소매소’를 관리했다. 염지정관리소는, 소금을 취급하는 각 지역의 합법적인 소매점이다. 국가에서 관리하는 소금을 공급받아 소비자들에게 골고루 판매했다. 소금이 부족하니, 철저하게 관리하여, 골고루 나눠야 했다. 문제는 탈법적인 사설 판매상들이다. 생산지에서 관리가 되지 않으니 결국 소비지역으로 이런 불법, 탈법 소금들이 흘러 다닌다. ‘사설 소금 판매상’이다.

내용 중에 ‘국가, 전매청’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국가가 전매청, 염지정소매소 등을 통하여 118만여 가마니의 소금을 넉넉하게 공급하고 있다고 말한다. 합법적인 소금이 넉넉하니 불법 소금을 사지 말라는 뜻이다.

이해 5월 소금이 민영화된다. 민영화 직전이니 소금 전매 제도가 어수선하게 무너지고 있었을 것이다. 전매청이 나서서, 민영화는 5월부터, 그 이전에는 일체 “민간 보유 소금은 없다”고 못을 박았다.
 

이른바 ‘2년 간수 뺀’ 천일염. 색깔이 희다.
이른바 ‘2년 간수 뺀’ 천일염. 색깔이 희다.

소금 부족은 고질적이었다. ‘조선왕조실록’ 태종 9년 (1409년) 11월의 기사다.

전지(傳旨)를 내려 구언(求言)하기를, (중략) 관중(管仲)은 소금을 굽는 이익을 계획하여 그 나라를 부강(富强)하게 하였고, 당(唐)나라 유안(劉晏)은 소금의 이익을 가지고 백성에게 무역하여 그 이익이 농사를 권하는 것보다 배나 되었으니, 그렇다면, 소금의 이익이 매우 중한 것입니다. 지금 국가에서 염장관(鹽場官)을 설치하여 소금을 구워 무역하니, 예전의 유법(遺法)입니다. 그러나, 포(布)라는 물건은 굶주린 사람이 먹을 수 없으니, 원컨대, 서울과 외방의 관염(官鹽)을 모두 쌀로 무역하여 군량(軍糧)을 보충하소서.

중국도 만성적인 소금 부족국가였다.

윗글에서, 소금과 관련하여 예로 든 사람이 2명이다. 관중(기원전 725?~기원전 645년)은 제나라 관리다. 춘추전국시대에 제나라 환공을 패자로 만든 명재상이었다. 그가 취한 정책이 ‘소금 굽는 이익을 계획하여 나라를 이롭게 만드는’ 것이었다. 국가가 소금을 관리했다. 소금을 팔거나 염세(鹽稅)를 지혜롭게 거두었다.


유안(716~780년)은 당나라 현종 등 4명의 황제를 모신 관리. 소금과 쇠를 관리하여 당나라의 재정을 튼튼하게 했다. 유안은 “백성들에게 소금을 팔아서(무역) 그 이익을 크게 취했는데 (그 이익이) 농사의 배나 되었다”고 했다.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지만, 그보다는 소금을 통한 이익이 훨씬 컸다. 글에는 ‘염장관(鹽場官)’이라는 직업도 등장한다. 염전을 관리하는 이다. ‘관염(官鹽)’은 관에 속한 ‘염전(鹽田)’에서 ‘구운’ 소금 혹은 관청에서 관리하는 소금이다. 이때도 민간에서 관리하는 소금 혹은 민간에서 사사로이 사고파는 소금이 있었다. 사염(私鹽)이다. 사염은 불법 혹은 탈법이다. 우리도 마찬가지. 소금은 국가, 관청에서 관리했다.

소금을 사고파는데 포, 옷감을 사용하지 말고, 쌀을 사용하자고 말한다. 쌀은 먹을 수 있지만, 옷감을 먹고 살 수는 없다. 물물교환이 흔했던 시절이다. 염전에서 일하는 이들은 먹지 못하는 옷감보다는 바로 식량으로 사용할 수 있는 쌀을 원했을 것이다. 쌀이면 군량미로도 가능하다.

소금 거래를 두고 많은 일이 벌어진다. 소금값으로 미리 옷감이나 쌀을 주었는데 미처 소금을 받지 못하는 일도 벌어진다. 지금으로 치자면, 사기에 해당하는 일이다.

한때, “천일염(天日鹽)은 우리 고유의 소금이 아니다”는 주장이 있었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고려, 조선 시대 소금은 천일염이 아니라 자염(煮鹽)이었다. 윗글에서 “소금을 굽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당시의 소금이 천일염이 아니라 자염이었음을 의미한다. 자염의 ‘자(煮)’는 삶고 끓이는 것이다. 자염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하고 힘들었다. 바닷물을 퍼와서 농도를 높인 다음, 큰 솥에 넣는다. 장작불을 피워서 솥 안의 소금물을 끓인다. 오랫동안 소금물을 끓이면 수분이 증발, 소금 결정체가 나타난다. 자염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조선 시대 말까지도 우리는 자염을 먹었다.

자염은 만들기 힘들었다. 바닷물을 퍼오고, 장작을 구해야 한다. 바닷물을 퍼오는 일도 힘들고, 장작을 구하고 운반하는 일도 힘들었다. 바닷물은 힘만 들이면 퍼올 수 있지만, 장작은 나무를 베고, 쪼개야 한다. 자염을 만드는 과정에 장작이 많이 들어간다. 나무를 구하는 일도 힘들었다.
 

,국내 혹은 외국의 가공 소금들. 포장도 여러 가지다.
,국내 혹은 외국의 가공 소금들. 포장도 여러 가지다.

소금물, 장작을 구하면 소금을 구워야 한다.

온종일, 장작불을 지펴야 한다. 이 과정도 힘들다. 여름이면 불가에 가기도 힘들다. 소금을 만든 다음, 운반, 관리하는 인원도 필요하다. 소금은 무겁다. 소금을 만든 다음, 배로 옮기고, 배를 운반하고, 다시 창고에 옮기는 모든 과정이 힘들었다. 특히 한여름, 한겨울에는 더 힘들었다.

소금 굽는 일을 하는 이는 염부(鹽夫)다. 염부 일이 힘드니 이 일을 하려는 이들이 드물었다. 사염이 아닌 관염의 경우, 적은 급료를 받고 염부 일을 하겠다는 이들이 드물었다. 계급상으로 하층민인 승려, 관노(官奴)들을 동원한 이유다.

자염이 지금의 천일염보다 편리한 점은 단 한 가지다. 지역과 관계없이 한반도의 모든 해안에서 소금을 생산했다. 바닷물, 장작, 가마솥, 염부만 있으면 자염을 만들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도 소금 세금, 염세에 대해서 상세한 이야기를 남겼다. ‘경세유표 제14권_균역사목추의(均役事目追議)_염세’의 영남 부분이다. “영남 해안에서 소금을 만들었을까?”라고 의문을 가질 필요는 없다. 영남 남해안 일대에서 많은 자염을 만들었고, 상당수를 영남 내륙에서 운반, 소비했다. 통영에서 김해 앞바다에 이르는 섬, 바닷가에서 많은 소금을 만들었다.

영남/“(전략) 동해(東海) 소금은 미치지 못하므로 황수(潢水, 낙동강) 좌우 연변 여러 고을은 모두 남쪽 소금을 먹는다./(중략) 나라 안 소금의 이익은 영남 같은 데가 없다. 명지도(鳴旨島, 부산 강서구 명지동)에만 매년 소금 여러 천만 섬을 구우며, 드디어 낙동포변(洛東浦邊, 경북 상주)에다 별도로 염창(鹽倉)을 설치하기까지 했다. 감사가 해마다 천만으로 계산하고 해평 고현(海平古縣, 구미시 선산군 해평면)에 해마다 소금 만 섬이 오니, 소금의 이[利]가 나라 안에서 첫째임은 이것으로도 알 수가 있다. 영남 감사의 녹봉은 팔도에 첫째이다. 내 생각에는 영남 여러 해변에 관염전(官鹽田) 수십 곳을 두어서(후략)

자염은 1907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천일염이 바뀐다. 일제가 일본과 대만에는, 당시로써는 획기적인, 소금 생산 공장을 세운다. 한반도에는 대만, 중국의 천일염 방식을 들여왔다. 인천의 주안염전이 시작이다. 주안염전의 천일염 제조 방법은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간다. 충청도 안면도, 전남 무안, 신안, 목포 일대의 염전이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를 거치며 오늘날의 천일염이 시작되었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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