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가을 숲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내 숨소리만이
고요한 가을 숲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내 숨소리만이
  • 시인 이병철
  • 등록일 2019.10.20 19:36
  • 게재일 2019.10.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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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가을 울진의 품에는 따뜻한 위로가

덕구계곡의 비경인 용소폭포.
덕구계곡의 비경인 용소폭포.

올해 여름 더위는 그런대로 견딜 만했다. 예년 같은 폭염이 찾아오지 않아 좋았다. 하지만 세상이 하도 소란스러운 탓에 장마보다 권태롭고 뙤약볕보다 고통스런 계절이었다. 연달아 북상하는 가을 태풍도 세상의 온갖 소음과 낯 뜨거운 풍경들을 다 쓸어버리진 못했다. 자꾸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이상, ‘날개’)에서부터 불어오는 열풍 때문이었다. 생활과 사람과 뉴스로부터 내가 달아나는 수밖에 없다. 아직 여름의 잔열이 남아 있는 서울을 벗어나 더 깊은 가을로 들어가는 순간, “혈이 탁 트이고서야 내 온몸이 잠망경으로 솟아오를 수 있”(김지훈, ‘시월의 잠수함’)음을 나는 믿어보기로 했다.
 

울진 북면 덕구계곡의 옥빛 계곡물과 단풍 눈부셔

용소폭포와 얼굴 마주하니 마음 속 문장 깊어진다
우리나라에 단 한 곳뿐인 자연용출온천 ‘덕구온천’
뜨끈한 온천수에 몸 담그면 근심 한번에 씻겨나가

다시, 울진으로 가는 길에 올랐다. 경북 바닷길 537km 기행의 마지막 발걸음을 뗀 것이다. 두 개의 계절이 지났다. 어느덧 햇살은 땅 위에 금빛 앙금을 남겨둔 채 허공에서 점점 얼음의 투명함을 입고 있었다. 가을, 가을이었다. 서울을 떠나 영동고속도로를 통과하면서 강릉 옥계의 흐린 낯빛과 마주봤다.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았다. 차창 밖 중앙분리대 너머에서 동해는 회색빛으로 넘실거렸다. 희끄무레한 파도가 마치 늙은 아버지의 흰머리 같았다. 삼척에 들어서자 빗방울이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이 비는 단풍을 더욱 붉게 물들이고, 갑각류의 속살을 단단하게 할 것이다. 서리를 흉내 내며 지상으로 흩어지는 가을비는 겨울의 마중물이다. 비가 그치고 나면 기온이 더 내려가고, 그때 빗방울은 눈송이로 몸을 바꿔 포구와 산 능선과 슬레이트 지붕과 녹슨 자전거 안장을 하얗게 덮을 것이다.

지난 늦봄의 울진은 아까시 내음으로 온몸을 뒤채는 거대한 한 마리 짐승이었다. 그때 불영사로 가는 길, 나는 금강송 군락을 통과하면서 입술까지 초록빛으로 물들어버렸다. 끊임없이 몸속으로 스며드는 아까시 향기에 대책 없이 취해 정신을 못 차렸다. 망양정에서 바라보는 아득한 ‘세상의 끝’ 수평선을 향해 나를 던지고 싶었다. 죽변항 대원대게센타에서 박달대게 살을 파먹으며 감격했다. 그러나 가을 울진에서는 그 들뜬 황홀감을 아마 다시 느낄 수 없을 것이다. 오월의 무성한 녹음, 웅장한 초록 그늘, 짙은 초록 페로몬, 축제의 환희, 나른한 게으름은 이미 옛일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 대신 또 다른 기쁨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 어느새 내 발길은 울진 북면의 응봉산 덕구계곡을 향하고 있었다.

숲에 들자 비가 그쳤다. 단풍잎 사이로 옥빛 계곡물이 흐르는 풍경에 절로 감탄을 터뜨렸다. 나뭇잎을 흔드는 계곡의 바람은 “별보다 반음 낮고 얼음보다 반음 높은 음조로”(김영래, ‘큰개자리 여인숙’) 내 귓가에서 음악이 되었다. 숨을 쉬면 서늘한 공기 끝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뒷맛이 묵직한 와인을 마시는 듯한 미감을 만끽하며 계곡의 더 깊은 내부로 걸어 들어갔다. 숨이 달 수도 있구나! 들이마시는 숨이 맛있어서 벌컥벌컥, 돌계단 몇 개를 거침없이 뛰어 올랐다. 고요한 가을 숲에는 계곡물 흐르는 소리와 내 거친 숨소리만이 들렸다. 떼쓰다 악에 받쳐 우는 애 울음 같던 매미 소리 잠잠한 수풀 속에서 풀벌레들이 이따금 장단을 맞췄다.

덕구온천리조트 스파월드 실내 스파 시설.
덕구온천리조트 스파월드 실내 스파 시설.

서둘러 잎을 버린 우듬지마다 흐린 가을 하늘이 걸려 있었다. 맑은 날씨가 아니어도 대기가 머금은 물방울들 덕분에 계곡의 오후는 한없이 청명했다. 아니다. 청명함은 내 마음의 날씨에서 돋아나는 것, 가을엔 풍경의 여백만큼이나 마음도 넉넉해진다. 봄도 좋지만 봄은 변덕스럽고 까칠하다. 봄에 비해 가을은 안정적이고 성숙하다. 예측 가능한 계절이자 다 자라난 어른이다. 30여분 정도 가을 숲을 걸어 들어가 용소폭포의 아름다움과 마주하는 순간, 나는 세상과 시간을 오래 견딘 지혜로운 이와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착각을 했다. 그는 물소리로, 나는 내 마음의 문장으로… 이야기가 깊어지려는데, 후두둑, 빗방울이 다시 떨어졌다.

덕구계곡에는 4㎞의 송수관이 설치돼 있다. 이 송수관은 땅에서 솟는 온천수를 실어나른다. 덕구온천리조트는 우리나라에서 단 한 곳뿐인 자연용출온천 관광 시설이다. 칼륨, 칼슘, 철, 중탄산, 불소, 나트륨, 마그네슘, 라듐, 황산염, 탄산, 규산 등이 함유되어 약알칼리성을 띠는 이곳의 온천수는 사철 자연용출온도 42.4℃를 유지한다. 그 물로 온천욕을 하면 신경통 완화 및 피부미용에 좋다고 한다. 행정안전부에서 지정한 ‘국민보양온천’ 시설인데, 까다로운 자격요건을 모두 충족했다. 인체유해성분 안전기준 25℃ 이상의 온천수를 하루 300t씩 양수할 수 있으면 ‘일반온천’으로 개발 및 이용이 가능하지만, ‘국민보양온천’의 기준은 훨씬 엄격하다. 온천수는 35℃ 이상이거나 25℃ 이상인 경우 유황과 탄산 등 인체에 유익한 성분을 1000㎎/ℓ 이상 함유하여야만 한다. 그밖에도 주변에 빼어난 자연 경관이 있어야 하며, 숙박 및 편의 시설 등을 갖추어야 보양온천으로 인증 받을 수 있다.

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갈아입을 옷과 간단한 짐을 챙겨 ‘대온천장&스파월드’로 향했다. 빗줄기가 거셌지만, 비를 맞으며 노천 온천을 즐길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끊고 ‘스파월드’부터 이용하기로 했다. 스파는 실내와 야외 시설로 나뉘어져 있는데, 수영모와 수영복을 반드시 착용해야 한다. 야구모자와 반팔, 반바지도 허용된다. 다만 면 소재의 티셔츠는 지양하는 게 좋다. 인공 야자수와 분수, 선베드가 이국적 풍경을 연출하는 실내 스파에는 평일임에도 꽤 많은 사람들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노천 레몬탕과 녹차탕, 히노끼탕에 번갈아 몸을 담갔다. 42.4℃의 온천수는 마음까지 훗훗하게 데우며 그동안 도시에서 쌓인 피로와 불안, 근심들을 한꺼번에 씻어주었다. 너무 편안해서 달콤한 졸음이 몰려왔지만, 차가운 빗방울이 이마에 떨어질 때마다 아늑함에 나른해지던 정신이 번쩍 깼다.

덕구온천리조트 야외 스파에서 즐기는 노천온천의 묘미.
덕구온천리조트 야외 스파에서 즐기는 노천온천의 묘미.

이번엔 대온천장에서 목욕할 차례다. 열탕에 몸을 담갔다가 찬비 흩날리는 야외 데크에 나가 뜨거운 알몸을 서늘한 공기로 식히는 묘미가 각별했다. 살갗에 오소소 돋는 소름이 마치 낯별처럼 보였으니까. 사우나까지 알뜰하게 이용한 후 몸의 물기를 털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온천의 열기가 아직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채로 휴게공간에 딸린 카페에 앉아 아이스커피를 마시니 그야말로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황홀했다. 이런 순도 높은 휴식이 또 어디 있을까? 온천 관광이 발달한 일본에서는 북해도 노보리베츠의 유황온천을 으뜸으로 치는데, 그곳의 대형 료칸인 ‘마호로바’나 ‘석수정’, ‘후루카와’ 등과 비교해도 덕구온천은 전혀 부족함이 없다. 지금 이 계절만큼 온천욕을 즐기기에 좋은 때도 없다. 물론 눈 내린 겨울, 노천탕에서 응봉산의 설경을 바라보는 일 또한 환상적이긴 할 것이다.

온천욕으로 몸의 긴장을 풀었더니 호텔방에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잠이 들었다. 잠에서 깨니 어느새 어두운 저녁, 호텔에 한식당과 푸드코트가 있지만 나는 종일 그치지 않는 가을비를 헤치고 죽변항으로 달렸다. 대숲의 기슭이라는 이름마저 낡아버린 죽변항, 사람들은 대부분 후포나 영덕으로 가고, 손님이라곤 가을비 타고 흘러든 나 같은 뜨내기뿐인 쇠락한 선창가. 나는 죽변의 그 쇠잔함을 좋아한다. 부두에 고인 빗물 위로 불빛들이 엎드린 채 등을 들썩이며 흐느끼고 있었다. 일찍 문 닫는 식당들을 어찌하지 못하고 그나마 불 밝은 집에 들러 홍게와 가리비를 포장해왔다. 게 찌는 동안 아주머니가 나 먹으라고 내준 고구마와 귤이 벌써 맛있었다. 아아, 어느 한 구석이 따뜻해지는 걸 보니 겨울이 가깝긴 가까운 모양이다.

그렇게 나는 가을 울진의 품에서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호텔로 돌아오니 창밖으로는 얼음 같은 빗방울이 떨어지고, 창을 통과한 불빛들은 그저 따사롭기만 한 가을밤의 평화가 나를 오래토록, 넉넉히 안아주었다.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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