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세태를 보면 인텔리겐차(intelligentsia)는 설 자리가 없다. 옛날에는 지식인 대접을 그래도 좀 했던 것 같고 받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절대 아니올씨다, 다.

그럴 만한 이유들이 있다. 먼저, 돈, 자본, 금권이 옛날보다 훨씬 더 세졌고, 이에 따라 지식, 지식계급, 지식인은 이것을 치장하는 용도 같은 것으로 떨어져 버렸다. 지식은 큰 회사 사장 집무실 뒤 서가의 금장 책들처럼 금권을 더 빛나게 하는 장식품 같은 것이 된다.

다음으로, 권력이 옛날 같지 않다. 옛날 옛적에는 ‘삼고초려’하는 것이 있어 어디 훌륭한 사람 숨어 있나 찾아다니기도 하고 통치자의 덕성을 드러내느라 일부러라도 학계 사람을 모셔가기도 했다. 다 옛날 말이다. 노무현 정부 이래 통치는 오로지 자기 사람들로나 거행된다. 그룹에 들지 못하면 아무 것도 없다.

이런 것들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 인텔리겐차들 스스로 타락해 버렸다는 사실이다. 옛날 옛적이 인텔리겐차들은 자신들의 존재 의미를 자기 자신을 위한 ‘사업’에 두지 않았다. 그들은 지식 자체를 위해 존재해야 했고 나아가 자신들을, ‘민중’ 같은, 비록 추상적이기는 해도 어떤 대의를 위해 쓰여야 하는 것으로 믿었다.

1980년대에 한국의 통치체제는 러시아 짜리즘 같은 것으로 상상되었고 많은 대학생들은 자신들이 러시아의 인텔리겐차 계급처럼 민중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사상의 훌륭함 여부는 그 내용이 얼마나 올바른가에 의해서뿐 아니라 그것을 밀고 나가는 태도가 얼마나 순수한가에 의해서도 ‘결정’된다.

지식인은 몸이 감금되어 있을 때조차 자유로울 수 있으니, 그들은 본래 스스로를 정신적인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물질과 돈과 육체성, 권력에 스스로 거리를 둘 때 그는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러니, 어떻게, 요즘 지식인들이 자유로울 수 있으랴. 의식이 이미 대부분 금권과 권력의 노예니 몸이 자유로울 수 있을 리 없다.

러시아 ‘브나로드’ 운동 같은 것은 얼마나 성스러웠던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쓴 체르니세프스키는 얼마나 고매했던가? 도스토옙스키는 그의 논리를 미워해서 『지하생활자의 수기』를 써서 밑바닥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수정궁’ 같은 세계는 인간 세상에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고 했다.

하지만 체르니세프스키는 투명한 이상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는 1862년에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졌고 1883년에 풀려나 곧 세상을 떠났다.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