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하면?’ 끊임없는 질문이 항공사 날게 했다
‘어떻게 하면?’ 끊임없는 질문이 항공사 날게 했다
  • 황영우기자
  • 등록일 2019.10.16 20:09
  • 게재일 2019.10.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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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항의 지역항공사 다시 취항해야 한다
① 해외 모범 저가항공사 미국 사우스웨스트(Southwest)

미국 사우스웨스트 항공기 측면 모습. /사우스웨스트 제공

교통은 지역의 발전을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이다. 세계 4대 문명의 발상지인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문명까지 모두 큰 강의 유역이다. 하나같이 농업에 유리한 물이 풍부하다는 장점과 함께 교통이 편리하다는 특징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세계 무역의 중심이었던 실크로드 또한 세계 각국으로 통하는 사통팔달의 교통로이다. 중국 비단의 로마로의 무역, 당제국과 비단길 무역, 불교의 전래 유통로, 몽골 제국와 동남아시아 및 해상 비단길까지 아우르고 있다. 현재 실크로드는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의해 철도, 항로 등 신 비단길이 형성되고 있다.

동해를 끼고 있는 포항시도 최적의 교통망 개설의 조건을 가지고 있다. 향후 북한과 러시아 연해주를 비롯한 중국과 일본으로 통하는 환동해 물류중심도시도약의 길이 열려 있다.

하지만, 인구 50만의 도시에 비해 하늘길은 빈약하기 그지없다. 포항시가 야심차게 기획했던 지역항공사 ‘에어포항’은 임금체불, 경영난 등으로 취항 10개월여만에 운항을 중단했다. 미국 댈러스 러브필드 공항을 허브공항으로 두고 있는 세계 3대 항공사인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사례를 토대로 날개가 꺽인 포항의 저가항공사 재취항 가능성을 짚어봤다.

 

미국의 ‘사우스웨스트’ 항공사
기존 업체 방해공작 속 고성장
직원들의 부서 구분 없는 협력
저운임·친절 서비스 정책 비결

항공기 내부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승무원의 모습. /사우스웨스트 제공
항공기 내부에서 서빙을 하고 있는 승무원의 모습. /사우스웨스트 제공


□ 사우스웨스트의 성공은 정신에 있다

위대한 업적을 기록한 회사들의 내부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신념, 의무, 사명감 등이 있다. 사우스웨스트도 예외는 아니다.

이 회사 직원들은 단순한 수익을 내기 위한 고용된 직원이라기보다 스스로 항공사업에 동참한 ‘십자군 운동가’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정신적 토대가 바로 사우스웨스트의 최저운임 유지의 기반이 되고 있다.

직원들은 평상시에도 ‘우리 비행기를 타는 손님들을 어떻게 하면 잘 보호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중소기업을 보호할 수 있을까, 저비용 때문에 우리 회사 비행기를 타는 노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잘 해드릴 수 있을까’ 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원칙을 고수한다.

이러한 원칙들을 사우스웨스트가 포기했다면 미국 소비자들이 혜택받은 연간 수십억 달러의 요금 인하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고 수익성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수익을 추구하는 이면에 그들을 움직이게 하는 동기는 바로 이러한 정신적 원칙에 기인하고 있고 이 점은 회사 창립에서부터 두드러지고 있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사의 역사를 보면 용기와 인내로 점철돼 있다. 미국 항공 업계 역사상 사우스웨스트 항공사처럼 극적인 투쟁을 거쳐 항공업에 진출한 유래가 없다.

사우스웨스트 항공사는 샌안토니오의 사업가이면서 자그마한 항공 서비스 회사를 소유한 콜린 킹과 그를 지원하는 은행가 존 파커의 합작품이었다.

1966년 킹은 대형 비행기를 가지고 텍사스 주의 주요 3개 도시를 운항하는 새로운 항공 회사를 만들겠다는 기획서를 들고 현재까지도 사우스웨스트의 역사적 인물로 일컬어지는 ‘허브 캘러허’를 찾아간다.

캘러허는 처음엔 이 아이디어가 황당하다고 생각했으나, 흥미도 가지고 있어 사업구상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했다. 1967년 3월 15일, 캘러허는 에어 사우스웨스트 컴퍼니(현재 사우스웨스트)의 법인 설립 서류를 법원에 제출한다.

킹은 캘러허의 도움을 받아 사업 구상을 대내외에 적극적으로 알리며 최초의 종자 자본을 모금했다. 2차 자본 모집에도 박차를 가했고, 정계의 정치적 도움도 요청했다. 결국 2차 자금 모집에서 킹, 캘러허, 내글리(캘러허의 처남), 피스(샌안토니오의 변호사·사업가·정치가) 등 4명의 사업가는 54만 3천 달러를 거두게 됐다.

1967년 11월 27일 캘러허는 사우스웨스트의 신청서를 텍사스 항공 위원회에 제출했고 1968년 2월 20일, 항공위원회는 이 신청을 허가했다.

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하늘에 비행기를 띄워 보기도 전에 브래니프, 트랜스 텍사스, 컨티넨털 항공사 등 기존 항공사들로부터 법적인 공격에 직면하게 된다.

 

항공사 화물 운송 담당자의 모습.  /사우스웨스트 제공
항공사 화물 운송 담당자의 모습. /사우스웨스트 제공


□ 어려움 속에 싹튼 기업 정신

기존 항공사들이 항공 위원회가 사우스웨스트에 항공업 면허증을 발급하지 못하도록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낸 것이다. 이들 항공사들은 사우스웨스트가 취항하려는 시장은 이미 포화 상태이며 신규 회사가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양측의 소송은 너무나 치열해 ‘텍사스 리포트’지는 한때 독자들에게 연예 오락이 따로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캘러허와 기존 항공업체를 대변하는 변호사들 사이의 법정 싸움이 매일 벌어졌으며 1심 법원에서 사우스 웨스트가 이 시장에 신규 진입하는 것은 허가할 수 없다는 판결마저 내려졌다.

종잣돈도 소송 비용으로 다 써버린 탓에 사우스웨스트 이사회 이사들은 피곤한 데다 좌절감마저 느꼈다.

이사회 중 일부 이사들이 차라리 손절매하고 회사 설립 구상을 포기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마저 내놓았다.

하지만 ‘파이터’캘러허는 당시 “여러분, 한 번만 더 싸워 봅시다. 내가 계속 회사의 법정 대리인으로 나서겠습니다. 나에게 주는 변호사 비용의 지불을 무기한 연기해도 좋습니다. 또 각종 법정 비용은 내 호주머니에서 대겠습니다”라며 설득했다.

캘러허의 열변과 사자후가 통했는 덕분이였을까. 대법원은 고등법원의 판결을 뒤엎고 사우스웨스트의 손을 들어주게 됐고 결국 사우스웨스트는 항공업 면허를 받게 됐다.

사우스웨스트가 중요한 싸움에서 이겼지만, 기존 항공사들은 ‘끈질긴 방해공작’을 그만두지 않았고 연방 대법원에 항소하며 향후 몇년 동안에도 여러번 법정 소송에 휘말리기도 했다.

다행히 타 항공사에서 백전노장으로 알려진 라마 뮤즈를 신임 대표 이사로 영입하면서 희망의 불씨가 재차 살아났다. 뮤즈는 항공업계 친구들 및 관련 인사들과 접촉하면서 7백만달러의 자금을 추가 확보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사우스웨스트의 초창기 법정싸움은 직원들을 오히려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됐다.

직원들은 댈러스 모닝 뉴스나 댈러스 타임스 헤럴드 등 지역 신문지에서 본인들의 회사 전망이 암울하다는 기사를 보면서 회사와 함께 죽기 살기로 싸우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느꼈다.

 


□ 경쟁 속에서 생존 전략을 찾아내다

사우스웨스트는 저운임 정책을 혁신적으로 도입했다. 당시만 해도 미국 항공 업계는 민간 항공국에서 승인받은 균일한 운임을 책정했다.

항공사들은 시장은 비행기 값을 낼 여력이 있는 세력과 그렇지 못한 세력으로 나뉘어 있다고 바라봤다. 항공료 인하는 곧 수입 감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기존 항공사들은 항공기 수송에 문제가 생기거나 비용이 상승하면 곧장 항공료를 올렸다.

하지만, 사우스웨스트는 이와 정반대로 움직였다. 낮은 운임과 훌륭한 서비스를 연결시키면 얼마든지 새로운 승객 수요를 창출할 수 있다고 봤다.

1973년이 되자 수익이 어느 정도 나기 시작한 상태에서 뮤즈는 리오그란데 밸리 일대에 눈독을 들이고 할링언 공항에 추가 취항을 신청한다.

이 판단은 정확했고 당시 텍사스 인터내셔널이 심한 노사 분규에 휘말린 상태에서의 밸리 일대 공백을 정확히 노려 기존 승객수의 거의 3배 가까이 증가하는 성과를 거둔다.

증가의 원인으로는 사우스웨스트의 낮은 운임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비행기를 탈 기회를 줬기 때문이고, 이를 통해 박리다매 가격 정책의 성공을 한번 더 확신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또한 지금도 회자되는 ‘10분 턴’전략을 실시해 마찬가지로 성과를 거두게 된다. 비행기를 빠른 시간 안에 회전시켜 정기 스케줄을 유지할 수 있었고, 또 항공업계 내에서 정시 발착을 가장 잘 지킨다는 전통을 쌓아 올릴 수 있었다. 기장 등 조종사와 타 부서 직원들도 비행기 출항 준비에 부서 구분없이 협력한 것이 비결이었다.

/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 지원을 받아 작성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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