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귀희

한적한 골목어귀 
피아노 한 대 웅크리고 있다
누가 놓아두고 갔을까
그 옆 민들레꽃 서너 송이
악보처럼 피어있는 
피아노는 날마다 
낡은 골목을 연주한다 
모서리가 해져 펄럭거리는
(….)
언젠가 ‘카이’*가 나타나 
감미로운 선율을 연주해 줄지도
다음날, 그다음 날 
동판, 철선, 헤머가 사라진 뒤에도
그 옛날 왁자했던 골목을
떠올리기라도 하는지

빈 집의 처마처럼
갸릉갸릉 소릴내며
골목을 연주하고 있다 

* ‘피아노의 숲’이란 에니메이션의 주인공. 숲속에 있는 고장 난 피아노를 ‘카이’가 치면 특별한 소리를 낸다.

한적한 골목에 버려진 피아노 한 대, 바람에 끝없이 아름다운 선율을 풀어내고 있는 피아노를 보며 평생 피아노 건반과 함께 살아온 시인은 피아노 밖으로 활짝 열리는 우주의 하모니를 듣고 있는 것이다. 비록 버려져서 녹슬고 비루한 모습으로 지워져 갈 운명이지만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선율을 풀어내는 버려진 피아노 같이 남은 생을 그리며 살아가야겠다는 마음을 다잡는 시인의 조용한 목소리를 듣는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