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영대구가톨릭대 교수
박상영 대구가톨릭대 교수

10월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가을이 한층 더 깊어지는 달이다. 천고마비는 원래 ‘추고마비(秋高馬肥)’에서 유래되었는데, 송대 <정강전신록>에는, ‘가을이 깊어지고 말이 살찌면 오랑캐들이 다시 쳐들어와 이전의 맹약을 책할 것을 두려워한다.’라는 기록이 있고, 사마천의 <사기>에는 흉노족들이 ‘가을에 말이 살찌면 대림(<8E5B>林)에서 큰 모임을 갖고 가축들의 수를 비교한다.’고 적혀 있다. 흉노족은 가을철이면 살찐 말을 타고 중국 변방에 쳐들어와 노략질을 일삼았는데, 이로 인해 변방 중국인들은 가을이면 늘 전전긍긍해야만 했다.

이처럼 가을이, 한쪽에선 약탈하기 좋은 계절로, 다른 쪽에선 두려움에 떠는 계절로 다가온 것은 아이러니컬하다. 그러나 선우(흉노족의 우두머리)의 입장에서는, 겨울을 대비해 중국 변방을 공격하여 자국민의 양식을 비축할 필요가 있었고, 중국 군왕들의 입장에서는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입을 막는 게 최우선의 과제였을 테니,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어느 쪽이든 모두 자국민의 생업 보장과 안전을 위한 위정자들의 고민이 ‘추고마비/천고마비’속에 함의되어 있었던 셈이다. 비록 한쪽에게 좋은 것이 다른 쪽에게는 그렇지 않긴 했어도. 적어도 자국민들을 위한 최선이 무엇일지는 늘 고민했던 위정자들의 흔적만큼은 엿볼 수 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인간사는 다 비슷비슷해서, 옛날이라 하여 위정자들이 늘 백성들만을 생각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수많은 당쟁과 사화들, 그 속에서 고통 받던 백성들이 일으킨 수많은 민란들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렇기에 이러한 위정자들을 깨치려는 노력은 옛부터 줄기차게 일어났던 바다. 이와 관련해, 허균이 남긴 논설 <호민론>은 주목할 만하다.

<호민론>에서는 백성을 세 가지로 분류한다. 위정자들에게 가만히 순종하기만 하는 항민(恒民), 윗사람을 원망하기만 하는 원민(怨民), 가만히 참으며 틈만 엿보다가 시기가 오면 일어나는 호민(豪民)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호민이 반기를 들면 원민들은 소리만 듣고도 절로 모이고, 항민들 또한 살기를 구해서 따라 일어나므로, 관직에 있는 자라면, 이러한 호민들을 두려워하여, 정치를 똑바로 하라는 것이 요지이다.

옛말에 ‘민심은 천심이다’라는 말이 있다. 민심에 근간한 정치를 왕도 정치라 하여 가장 이상적으로 여긴 것도 이 때문이다. 옛 제왕들은 민심을 잘 파악하고자 언로(言路)를 확대하고 상소제도를 두었으며, 끊임없이 자기 수양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제도만 두고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나 ‘귀’가 없다면, 그 또한 옳지 않다고 여긴 탓이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스스로의 몸과 마음을 끊임없이 갈고 닦는 수신(修身)을 무엇보다도 크게 생각하곤 하였다.

요새 들어 인재 등용 문제를 비롯해 여러 가지 사회 이슈들로 나라가 떠들썩하다. 정치적 입장에 따른 시위대들의 시시비비를 논하기에 앞서, 이 천고(天高)의 계절 가을에, 위정자들은 민심의 소리에 깊이 한번 귀를 기울이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스스로의 마음을 맑게 가꾸고 살찌워 보는, 심비(心肥)를 우선적으로 실천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