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신임옥사(辛壬獄事)로 장기와 인연을 맺은 중앙의 관리들

글귀 지워진 비석. 장기읍성 입구에 있다. 글을 새긴 사람은 뭔가를 남겨 후세까지 영원하기를 바랐겠지만, 세월의 풍파와 함께 지워지고 없다. 내용을 잊어버린 채 이끼에 파묻힌 이 돌비석은 철새들을 떠나보낸 빈 둥지처럼 허허로운 모습으로 길목을 지키고 있다.

신임옥사(辛壬獄事)는 신임사화(辛壬士禍)라고도 한다. 옥사는 ‘감옥에 대거 갇히는 사건’을 말하는 것이고, 사화는 ‘의로운 선비들이 화를 입었다’는 말이다. 즉 조선 전기 훈구파와 사림파가 맞서 싸울 때 사림이 대거 화를 입었던 것을 사화라고 한다. 이와는 별도로 조선중기 이후 사림·훈구의 구별이 없어졌을 때, 붕당정치가 이어지면서 ‘일순간에 정권이 확 바뀌는 것’을 사화나 옥사라 하지 않고 그냥 ‘환국’이라고 했다.

조선 경종 초기인 1721년(신축년)부터 1722년(임인년)까지 노론과 소론이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책봉하는 문제를 놓고 충돌한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은 ‘노론 4대신과 그 일당 60여 명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을 추대하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목호룡(睦虎龍)의 고변으로까지 연결되어, 노론을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옥에 들어갔기 때문에 신임옥사라 한다.

신임옥사로 중앙에서 칼바람이 몰아칠 때, 그 여파로 장기현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바로 노론계의 신사철, 김광택, 김석증이 그들이다. 신사철은 김재로 등과 함께 소위 ‘삼수육창(三壽六昌)’의 한사람이자 노론 4대신의 중심인물인 김창집(김수항의 아들)의 당이라는 이유로 1723년 1월 19일 장기로 유배를 왔다.

김광택은 노론계의 중심인물 60여 명 중 한사람으로 신임옥사 때 죽은 김용택의 동생이었다. 김용택은 숙종이 사류(士類)들을 대거 등용할 때, 이이명의 천거로 벼슬길에 올랐지만 목호룡의 고변으로 하옥되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김석증도 김용택의 가족으로 연좌되어 이곳으로 와 노비가 되었다.

이들을 장기현까지 내몰고 온 신임옥사의 내막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야말로 당파간의 중상과 모략의 연속이었다. 숙종이 죽은 후에 장희빈의 아들 경종이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경종 외에 또 다른 왕자를 두었는데, 바로 무수리였던 숙빈 최씨의 아들 연잉군이었다. 그러니까 경종과 연잉궁은 배다른 형제이다. 정치적 배경이 남인이었던 장희빈은 숙종 당시의 집권세력이었던 노론들에 의해 사약을 받고 이전에 죽었다.

신사철의 영정.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노론계인 그는 대사간,대사성,대사헌을 역임하다 신임옥사 때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영조 즉위 후에는 호조판서가 되었다.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신사철의 영정. 그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노론계인 그는 대사간,대사성,대사헌을 역임하다 신임옥사 때 장기에서 유배생활을 하였다. 영조 즉위 후에는 호조판서가 되었다. 영정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런 장희빈의 아들이 경종이 되었으니 그도 당연히 남인 편이었다. 이제 노론들의 운명은 언제 꺼질지도 모르는 바람 앞에 등불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당시 조정에는 경종의 편이 될 남인들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1694년(숙종 20) 폐비민씨(廢妃閔氏)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남인들이 화를 입어 실권하고 서인이 재집권하게 되었던 갑술환국때 남인은 거의 다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정에는 이제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대립을 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소론들은 일부 남아있는 남인들과 힘을 합쳐 뜻을 같이하고 있었다.

경종은 남인을 다시 등용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연산군처럼 건강하지가 못했다. 즉위 당시 34세였던 경종은 자식을 낳지 못했을 뿐 아니라, 병석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자신의 정치적 배경이었던 남인을 구원하여 등용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만약 경종이 건강만 따라줬더라면 당시 노론들의 운명은 어떻게 전개되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노론에게는 경종의 이런 건강 악화가 천만 중 다행이었을 것이다. 노론의 일부 대신들은 상소를 올려 경종의 병약함을 이유로 동생인 연잉군을 세자로 삼으라고 압박했다. 몸이 허약하고 자식도 따로 없었던 경종에게는 신하들의 요청을 단번에 물리칠 힘이 없었다. 할 수 없이 경종은 노론 대신들의 요구대로 연잉군을 세자로 세웠다. 자식이 아닌 동생을 세웠으니 왕세제라고 해야 맞다. 동생을 세자로 삼는 것을 허용한 경종에게 이번에는 노론이었던 조성복이 상소를 올려 ‘임금이 몸이 약해 정사를 제대로 볼 수 없으니 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도록 하라’고 강요를 했다. 경종은 마지못해 이 요구도 받아들였다.

이런 노론의 행위를 지켜보는 무리가 있었으니, 바로 소론들이었다. 이조참판으로서 소론의 영수인 조태구, 류봉휘(柳鳳輝) 등은 대리청정의 부당성을 상소하였고, 최석항은 한 밤중에 왕을 찾아가 울면서 명령을 환수하기를 청했다. 밤을 꼬박세운 최석항의 설득으로 결국 경종은 대리청정 명령을 철회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행위에 대해 노론이 또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노론은 떼를 지어 왕에게 몰려가 침전 앞에서 본래대로 대리청정을 시행하라고 호소하였다. 이어서 노론 소론 할 것 없이 각자 자신들의 입장을 지지하는 상소가 빗발쳤다. 경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황에서 머리만 부여잡고 있었다. 이때에 역사의 획을 긋는 상소가 하나 올라왔다. 1721년(경종1) 12월 6일, 소론의 김일경이라는 사람이 올린 다음과 같은 상소였다.

…임금에게 (감히) 대리청정할 것을 요구한 죄를 지은 자들에게 죽음을 내렸다는 임금의 명령과, 승정원과 삼사가 그들이 저지른 죄목을 들어 엄하게 꾸짖도록 임금에게 청했다는 말을 아직 듣지 못하였나이다. 법으로 이들을 엄단하시어 군신의 대상을 세우시고 흉적들로 하여금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게 하시옵소서.

한눈에 봐도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을 척결하여 왕의 권위를 살리라는 탄핵상소였다. 경종은 이 상소를 보자 자신의 처지에 대한 한탄과 함께 도저히 노론을 그냥 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경종은 자신을 지지하는 소론을 등에 업었다. 이 탄핵상소를 근거로 노론을 쫒아내고 소론을 등용하기 시작했다. 왕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노론의 4대신이 잡혀왔다. 이이명·김창집·이건명·조태채 등이 그들인데, 경종이 이들 모두를 극변으로 유배를 보내 위리안치 시켜버렸다.

서서히 권력을 잡기 시작한 소론은 내킨 김에 노론을 완전히 제거하기로 마음먹었다. 국왕의 마음을 움직인 상소문을 작성한 김일경이 앞장섰다. 그는 이제 대사헌을 거쳐 형조판서가 되어 있었다. 우선 노론의 인물 중 목호룡이란 사람을 매수했다. 목호룡은 남인 천얼 출신으로 청능군(靑陵君)의 집안 노비였으나, 풍수를 배워 연잉군 사친(私親)의 장지를 잡아주고 노비에서 양인이 되었다. 이후에 궁궐의 토지와 곡식을 관리하면서 부호가 되었다. 평소 시를 잘 지어 노론계인 김용택·이희지 등과 친밀하게 지내며 연잉군을 보호하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변심을 하고 1722년(경종2) 소론에 가담했던 것이다. 그는 김일경의 사주를 받고, 자신이 노론계의 정인중ㆍ김용택ㆍ이천기ㆍ백망ㆍ심상길ㆍ이희지ㆍ김성행 등 60여 명과 모의해 경종을 시해하고 이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몄다고 왕에게 고발하였다. 이게 이른바 ‘목호룡의 고변사건’이다.

목호룡으로부터 고변을 들은 경종은 크게 노했다. 목호룡이 거론하였던 노론의 인사들을 모두 잡아와 투옥하라고 했다. 잡혀온 사람들은 이미 유배를 가 있던 노론 4대신들과 그들의 가족 및 추종자들이었다. 백망((白望)은 이것은 세력을 잃은 소론과 남인이 왕세제를 모함하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심문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은 이를 묵살해버렸다.

소론 4 대신 중 한 사람인 류봉휘와 그 일가들의 묘,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3리에 있다. 류봉휘의 조카인 류경원은 노론이 집권하자 장기로 유배되었다.
소론 4 대신 중 한 사람인 류봉휘와 그 일가들의 묘, 경기도 양평군 옥천면 용천3리에 있다. 류봉휘의 조카인 류경원은 노론이 집권하자 장기로 유배되었다.

결국 역모자로 거론된 이천기ㆍ김용택 등과, 앞서 연잉군을 왕세제로 만들었던 노론 4대신인 이이명 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고, 노론 수백 명이 살해 또는 추방되었다. 반면 목호룡은 이 일로 부사공신(扶社功臣)에 올랐다가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의 벼슬을 받고 동성군(東城君)에 피봉되었다. 이런 노론 숙청 과정이 신축년과 임인년 두 해에 걸쳐 일어났기 때문에 앞의 두 글자를 따서 신임옥사라고 한다.

이 피비린내 나는 숙청의 정국 속에서 가장 겁을 먹은 사람은 연잉군이었다. 자신을 지지하던 노론 세력들이 대거 죽거나 귀양을 가는 상황을 지켜보고 있으면서, 자신도 언제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임을 당할지도 모르는 조마조마한 세월들이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병약한 몸을 이끌면서도 소론과 남인들을 다시 등용하려고 애썼던 경종이 즉위 4년 만에 죽고 말았다. 경종의 죽음에도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 37세는 몸이 약했다고 하더라도 죽기에는 너무 이른 나이였다. 경종 죽음에 관한 추측 중에는 궁궐에서 일하던 나인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설이 있다. 붕당정치가 극으로 치닫던 이 시기에는 궁중에서 일하던 내시와 궁녀들조차도 노론·소론으로 갈라져서 온통 당색이 가득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국왕의 독살설이 나올 법도 하였다.

경종이 죽고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말자 노론이 재집권했다. 영조는 이조판서로 있던 김일경부터 유배를 보내버렸다. 그러다가 청주의 유생 송재후의 상소를 발단으로 신임옥사가 무고였다는 노론의 집중적인 탄핵이 시작되었다. 신임옥사의 주동자였던 김일경과 목호룡이 함께 투옥되어 친국을 받았다. 김일경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영조를 왕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그는 영조를 ‘나으리’라 부르며 끝내 공모자가 없다고 우겼다. 별수 없이 목호룡과 김일경 두 사람만 당고개(唐古介)에서 목이 잘렸다. 목호룡의 머리는 3일간 거리에 달아매어졌고, 그가 전에 경종에게 밀고한 고변문서는 불태워졌다.

노론이 재집권하면서 장기로 유배를 왔던 신사철은 복권이 되었다. 돌아간 그는 대사헌, 호조판서, 예조판서를 계속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걷는 듯 했다. 하지만 정미환국으로 다시 노론이 추방될 때 파직되었다가 1728년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에 등용되는 등 부침(浮沈)이 계속되었다. 1740년까지 그는 공조 · 예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여러 번 지냈고, 1745년 판중추부사를 끝으로 관직을 내려놓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기로소는 정2품 이상 전 현직 문관이 나이 70세 이상이 되면 들어가는 일종의 예우기관이었다. 두 아들도 정승에 올라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신임옥사의 여파로 장기에서 1년 넘게 노비생활을 하던 김광택과 김석증도 1725년(영조1) 4월 2일 유배에서 풀려 고향으로 돌아갔다.

한편, 신임옥사가 있은 지 34년이 지난 1755년(영조 31)에는 그 반대세력인 소론계 인사가 장기현으로 유배를 왔다. 바로 소론 4대신의 중심인물인 류봉휘의 조카 류경원(柳景垣)이 이곳으로 와서 안치된 것이다. 앞서 언급한 류봉휘는 강경 소론파로 연잉군에게 대리청정을 맡기는 것이 부당하다는 상소를 경종에게 올려 대리청정을 철회하게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1725년 영조가 즉위하고 탕평책으로 노론·소론의 연립정권이 수립될 때 소론이었지만 우의정에 등용됐다. 이어 좌의정에 제수되었으나, 30여년 후 강경파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자 새삼스럽게 신임옥사를 일으킨 주동자로 그가 지목되어 탄핵을 받게 되었다. 결국 함경북도 경흥(慶興)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세상을 떠나야만 했다. 사후 관작이 복구되었으나 1755년 다시 반역죄로 추형(追刑)을 당했다. 추형을 당할 때 그의 가족들도 연좌되어 며느리와 손자는 물론 조카들까지 모두 유배를 보냈던 것이고, 조카 중 한사람인 류경원이 장기로 온 것이다.

역사를 되짚어 보면, 18세기 장기현은 노론과 소론의 정치이데올로기 싸움의 한가운데 있었다. 그런 장기현은 싸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마치 철새처럼 날아와 한동안 머물면서 겨울을 피해갔던, 도래지(渡來地)와도 같은 곳이었다. 아니, 아늑한 보금자리와도 같은 곳이었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