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울릉도를 지키는 사람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

마티스와 샤갈의 팔레트에도 없을 신비한 푸른색을 띤 북면 바다.

어제 천국에 다녀온 덕분에 잠을 잘 잤다. 물론 저세상이 아니라 ‘울릉천국’ 이야기다. 고백하건대, 서울에서 나는 매일 밤 불면으로 괴롭다. 무슨 죄가 그리 많은지 잘못한 일들이 끊임없이 떠올라 도무지 잠들 수가 없다. 불면으로 죗값을 치른다 생각해도 억울하다. 교도소에 수감된 죄수들도 잠은 잘 자지 않는가.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양을 세기 시작하면 잠은 저 멀리 달아난다. 그런데 지난밤에는 어떤 상념도, 후회도, 한스러움도, 그리움도, 미안함도 없이 스르르, 푸른 잠결에 스며들었다. 맑은 풍경이 마음을 깨끗하게 한 모양이다. 나는 어제 자연에게 용서 받았다. 자고 일어나니 몸과 마음이 다 가볍고 개운했다.

 

향토성 간직한 울릉도의 음식
바다가 키운 사람의 마음 담겨
짠맛·구수한 맛·슴슴한 맛 내

대풍감서 바라본 북면 해안은
우리나라 10대 비경 중 하나
색채 마법사 마티스·샤갈의
팔레트에도 없는 파랑 눈부셔

저동항 정애식당 홍합밥.
저동항 정애식당 홍합밥.

저동항 ‘정애식당’ 미닫이문과 함께 울릉도 여행 마지막 날이 열렸다. 울릉도에 왔으면 홍합밥을 꼭 먹어봐야 한다. 누가 내게 그러라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내 생각이다. 주문과 동시에 밥을 짓기 때문에 2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 싱싱한 홍합을 잘게 다진 야채와 함께 미리 불려놓은 쌀에 넣고 밥을 지으면 홍합밥이 된다. 홍합 육수가 밥알에 스며들어 노르스름한 빛깔을 띤다. 간장 양념장을 두세 숟갈 넣어 슥삭슥삭 비비면 고소하면서도 싱그럽고 짭조름한 냄새가 코로 훅 들어온다. 갓 지은 쌀밥의 꼬들꼬들함과 자연산 홍합의 탱글탱글한 식감이 어우러져 씹는 맛이 좋다. 울릉도 음식은 대단히 맛있기보다는 오래 기억되는 쪽을 스스로 택해 지금껏 향토성을 유지하고 있다. 촌스럽고 투박한 밥과 국, 탕, 국수에서는 너그러운 바다의 품이, 바다의 품이 키운 사람의 마음이 짠맛, 구수한 맛, 슴슴한 맛, 시원한 맛, 칼칼한 맛을 낸다.

울릉도의 최서북단인 태하로 차를 몰았다. 그곳에 예로부터 향나무가 많아 ‘향목령’으로 불린 고개가 있다. 울릉도 향나무들은 벼랑에 뿌리를 박은 채 소금 햇살을 삼켜 잎맥을 키우고 젖은 해풍을 머금어 간신히 물관을 적신다. 바람을 기다리는 언덕이라는 뜻의 ‘대풍감(待風坎)’에는 순풍에 돛을 밀며 먼 바다로 나아가고픈 뱃사람들의 소망이 천연기념물 제49호 대풍감향나무와 함께 자라난다. 태하향목모노레일 승차장에서 앙증맞은 모노레일을 타고 대풍감 산책로에 내렸다. 15분 정도 숲길을 걸어 대풍감에 오르는 순간 온몸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몸속에 있는 모든 함성들이, 마음속에 있는 모든 감탄들이, 웃음들이, 눈물들이 목구멍으로 달려 올라와 저 먼저 쏟아내 달라고 아우성을 하는 통에 눈과 코와 귀와 입을 한꺼번에 열 수밖에 없었다.

 

울릉도 관광의 명소 중 하나인 버섯바위.
울릉도 관광의 명소 중 하나인 버섯바위.

대풍감에서 바라보는 울릉도 북면 해안은 월간지 ‘산’에서 꼽은 우리나라 10대 비경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색채의 마법사라는 마티스나 샤갈의 팔레트에도 없는 파랑색 바다는 현무암 바위들이 내민 검은 입술과 키스한다. 하늘은 한없이 높고 또 함부로 낮으며, 아득히 멀고 또 아무렇게나 가깝다. 이 비경을 공감각적 풍경으로 완성하는 것은 해풍이 실어 나르는 향나무 향기, 그러니까 대풍감은 자연의 ‘4D 아이맥스 영화관’인 셈이다.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우리나라에, 아니 세상에 또 있을까? 대풍감에서 나는 이 세계를 더욱 사랑하게 됐다. 지금 이 글을 읽는 이에게 이 말을 꼭 하고 싶다. 삶이 지루하고 단조롭게 느껴진다면, 세상이 온통 어둡고 좁게만 느껴진다면 반드시 대풍감에 가보라고.

대풍감에는 1958년부터 불을 켠 울릉도등대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태하등대라고 부른다. 높이 7.6m의 하얀 등탑 안에 항로표지관리원이 근무하는 유인등대다. 해양수산부의 ‘유인등대 무인화 계획’에 따르면 오는 2022년까지 부산 오륙도, 포항 송대말, 제주 산지, 군산 말도, 여수 소라도, 강원 고성 대진, 그리고 울릉도의 등대 몇 곳이 무인등대로 전환된다고 한다. 이미 무인화가 된 곳도 있고, 아직 등대지기가 지키는 곳도 있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이곳 울릉도등대도 언젠가는 무인등대가 될 것이다. 나는 향로표지관리원이라는 엄숙한 직함보다 등대지기라는 다정한 이름을 좋아한다.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한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지금도 노래 ‘등대지기’만 들으면 눈물이 난다. 이곳 등대에서 마지막 등대지기가 떠나는 날, 별들도 운행을 멈춘 채 눈물 같은 빛방울을 흘릴 것이다. 등대가 한 그루 듬직한 나무라면 몸속으로 나이테 수십 개쯤 우습게 그렸을 세월이 아닌가? 등대와 등대지기는 바다가 쓰는 책의 주인공, 긴 이야기의 끝이 이제 가깝다.

 

통구미 거북바위가 햇빛을 머금고 있는 광경.
통구미 거북바위가 햇빛을 머금고 있는 광경.

‘바람을 기다리는 언덕’을 내려와 서면의 버섯바위를 구경했다. 버섯을 닮았다 하여 버섯바위인데, 층층이 쌓아올려진 ‘버섯갓’ 모양의 퇴적암이다. 화산 용암과 재가 굳어 쌓인 바위를 파도와 칼바람이 함께 깎아내 신비한 조각작품을 만들었다. 남양리 비파산 국수바위도 감상했다. 157만년 전 용암 분출로 만들어진 이 바위는 높이 30m, 길이 300m에 달한다. 벽면에 수많은 주상절리가 국수가락처럼 늘어져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바위 구경에 통구미의 거북바위를 빼놓을 수 없다. 통구미는 울릉도의 유일한 자연 포구, 거기 우뚝 선 거북바위는 그 모양이 기어가는 거북이를 닮았다. 가까이서 보면 바위 곳곳에 거북이 형상의 자연석들이 있다고 한다. 눈 밝은 사람들은 엄마 거북바위에서 아기 거북이를 12마리나 찾아낸다는데 나는 세 마리밖에 못 봤다. 나머지 아홉 마리는 다음에 와서 꼭 찾을 것이다.

도동항에 와 케이블카를 타고 독도전망대에 올랐다. 하지만 독도는 볼 수 없었다. 맑은 날보다 오히려 구름 낀 날 잘 보인다고 한다. 독도전망대 아래에는 독도박물관이 있다. 1997년에 개관한 우리나라 최초, 유일의 ‘영토 박물관’이다. 독도가 우리 땅임을 증명하는 고문헌과 고지도, 독도의 역사, 자연환경 및 생태계, 독도의용수비대의 기록 등을 전시 및 설명하고 있다. 박물관을 거닐며 뜨거워지는 가슴을 어찌하지 못해 여러 번 눈시울이 붉어졌다. 독도에 가보지 못하고 울릉도를 떠나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아쉬웠다. 그러나 아쉽게 헤어져야 재회도 가능한 법, 나는 짝사랑하는 소년처럼 독도를 마음에 품은 채 독도박물관을 나섰다.

수많은 관광객들이 오후 3시 30분 썬플라워호를 타고 울릉도를 빠져나간다. 출항 한 시간 전, 북새통 도동항은 온갖 목청으로 요란했다. “이리 오이소” 소리, 상인과 손님이 에누리 다툼하는 소리, 낡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뽕짝소리, 오징어 냄새, 젓갈 냄새, 호떡 굽는 냄새…. 소리와 냄새가 괭이갈매기보다 먼저 와 나를 배웅했다. 항구는 생명과 역동의 에너지로 충만하다. 그 에너지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고, 냄새 맡고, 맛보면서 나는 오늘을 사는 울릉도 사람들을 만났다. 흥겨우면 흥에 취하고, 언짢으면 곧장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순수한 사람들. 알 수 없는 뭉클함을 애써 누르며 나는 “울렁울렁 울렁대는 가슴 안고” 여객선 탑승구로 향했다.

급변하는 시대의 한 구석에서 발버둥을 치며 제 살아있음을 증명하려는 오래된 것들, 촌스러운 것들의 처절한 몸짓을 본 까닭인지도 모른다. 등대지기도, 천막집도, 항구의 좌판을 이루는 작고 소소한 소리와 냄새도 조금씩 변해가거나 사라지는 중이다. 열심히 북을 두드리며 익살스러운 춤을 추는 울릉도 호박엿장수의 흥겨운 놀이판이 슬픈 피에로의 연극처럼 측은했다. 상념에 빠진 내 앞에서 “뭐 그리 복잡해. 신나게 한판 놀고 마음껏 사랑하다 가면 그만이지” 엿장수와 구경꾼들이 한데 어울려 춤판을 벌였다. 그러자 썬플라워호의 탑승구가 열렸다. 나는 2층 선실에 앉아 눈을 감았다. 등대지기, 엿장수, 이장희, 군청 주무관, 두꺼비식당 아줌마, 학포 이장님, 홍순칠, 안용복, 독도의용수비대…. 울릉도와 독도를 지키는 사람들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시인 이병철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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