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다
  • 등록일 2019.10.07 18:55
  • 게재일 2019.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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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현명 시인
조현명 시인

A는 문제아였다. 만나는 선생님들마다 외면했다. 도와준다고 말을 건넸다가 오히려 나쁜 일을 당하는 수가 많았다. 후배들의 돈을 빼앗는 것은 작은 일이었다. 오토바이를 훔치거나 성폭행범으로 신고 되기도 하고 동네 불량배에 끼어서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당연히 선도위원회나 학교폭력대책 자치위원회에 이름이 여러 번 올라오기도 했다. 그때마다 위원들은 한탄만 하고 끝이 났다.

“이런 아이는 작은 잘못에도 강하게 처벌해야합니다. 그러질 못하니 잘못을 키워주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몽둥이찜질로 정신 차리게 할 수 있는데 요즘은 그렇게 하지도 못하고….”, “경찰과 검찰에서도 청소년이라고 양형기준을 낮추어버리니 그걸 이용합디다.”

결국 A는 폭력과 절도 강도 성폭행으로 소년원 생활을 했다. 이후 학교생활에서도 사고뭉치였다. 오히려 더 대담하게 사고를 쳤다. 교사들은 “앞으로 큰 범죄자가 될 것이다.” 라고 했지만 아무도 교정하려는 사람은 없었다. 이런 아이는 극소수다. 대다수의 아이들은 그에 비하면 착한 수준이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다는 것에는 동일한 것 같다.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는 교육현장에서 학생들이 두려움이 없어진다면 교육이 뿌리 채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개×× 같은 욕을 하는 것은 차라리 애교스럽다.

“당신은 우리가 낸 세금과 납입금으로 월급을 받지 않느냐?”는 말을 해, 당혹스럽게 하기도 하고 컴퓨터가 말썽일 때 학생의 도움을 받으면 “너는 손이 없냐? 발이 없냐?” 같은 요즘 힙합가사를 흥얼거린다. 교사를 비아냥대고 교사로 대하지 않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화를 내고 체벌을 하면 신고하겠다고 협박한다. 흉기를 들고 달려들거나 주먹질해오면 교사는 방어권도 없다. 방어하다가 되려 학생에게 폭행을 가한 것으로 책임질까 두렵다. 피하는 것이 상수다. 이것은 교육을 포기하는 일이다.

이지경이 된 것은 기존의 교육철학이 뒤흔들렸기 때문이다. 교육당국이 두려움을 기반한 교육을 부정하고는 대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는 아직도 두려움을 기반해 운영되고 있다. 그런데 교사들에게 ‘사랑의 매’를 빼앗고 ‘학생 인권 조례’ 같은 것으로 학생들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무조건 오래 참고, 교사의 사랑으로 감화하라는 무언의 압력이 매뉴얼처럼 내려 보내졌다.

두려움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교육사례는 ‘서머힐’이나 뉴욕의 ‘자유학교’정도이다. 그것은 성공했다고 보기 힘이 든다. 왜냐하면 소수교육에 적용된 것이기 때문이다. 다수의 보통학교에서 그런 예를 찾기 힘 든다. 세상의 질서는 ‘두려움’으로 계층지어 있고 그것을 학교교육 또한 따라 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도 A같은 아이는 두려움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아니면 ‘서머힐’ 같은 대안교육으로 보내든지.

다수 보통학교에서 두려움이 없는 아이들이 양산되는 것을 이제는 막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서 뭘 해야 할지는 뻔하다. 현장 교사들에게 물어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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