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박상검(朴尙儉)의 옥(獄)과 환관 송상욱((宋尙郁)

장기유배문화체험촌 중심부에 자리한 220인 기록 이야기 벽. 조선시대 장기로 유배 온 220여 명의 유배객들에 대한 저마다의 사연들을 엿볼 수 있다.

환관(宦官)은 통상 내시(內侍)라고도 불렀다. 환관들은 거세된 남자로, 궁에서 일하는 직책이다. 이들은 내시부(內侍府)에 속해 대궐 안 음식물의 감독, 왕명의 전달, 궐문의 수위, 청소 등의 임무를 맡았다. 오늘날로 치면 청와대 비서관의 일종이었다. 내시부의 정원은 140명. 그들은 왕과 왕비 등 왕족을 모신 유일한 남자 궁인이었다.

내시부의 으뜸 벼슬은 왕의 식사와 수행비서 역할을 하는 종2품 ‘상선’이었다. 종2품은 조선시대 제4위 품계로 그동안 ‘내시’하면 떠올리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권력을 보여준다. 그 대표적인 예를 중국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진시황을 보좌하던 환관 조고(趙高)는 ‘황제의 자리를 맏아들 부소에게 넘기라’는 진시황의 유언을 무시한다. 그는 둘째아들 호해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긴 후 부소를 죽이고 권력을 농단하기에 이른다. 일개 환관에 의해 황제의 권력이 좌지우지되었던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 진(秦)나라는 결국 통일된 지 15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환관하면 김처선(金處善)이라는 사람이 떠오른다.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했다. 조선 전기 여러 왕을 시종한 그는 문종 때 경상도 영해로 유배되었다가, 단종 때 풀려나 직첩이 되돌려졌다. 1455년(단종3) 정변에 관련되어 삭직·유배되었고, 세조 때 복직되었다. 1460년(세조 6) 원종공신(原從功臣) 3등에 책록되었으나, 세조의 미움을 받아 자주 장형을 당하였다. 성종 때에는 의술을 알아 대비의 신병치료에 이바지하여 가자(加資)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이르렀다. 연산군이 즉위하자 다시 시종에 임하였으나, 직언을 잘하여 미움을 받았다. 1505년 연산군이 스스로 창안한 처용희(處容戱)를 벌여 그 음란함이 극에 달하자, “임금치고 이토록 문란한 왕은 없었소이다“라고 극간(極諫)하다가 다리와 혀가 잘려 죽었다. 연산군은 그의 집을 당일로 철거하여 못을 파고 죄명을 돌에 새겨 그 집 길가에 묻고 담을 쌓게 하였다. 모든 문서에 ‘처(處)’자 사용을 금하여 처용무(處容舞)를 풍두무(豊頭舞)로 고치고, 일력 중 처서의 ‘처’자가 김처선의 ‘처’자와 같다하여 조서(徂暑)로 고치기까지 하였다. 김처선의 양자도 죽였고, 친족을 칠촌까지 연좌하여 처벌하였다. 하지만 1751년(영조 27) 고향에 정문(旌門)이 세워졌다.

이런 환관들은 당파싸움의 희생물이 되기도 했다. 특히 왕위 계승의 정통성이 문제가 되었던 광해군과 인조, 남인과 서인이 경쟁하였던 숙종대, 노론이 주도하면서 소론이 대항하였던 경종과 영조의 교체시기, 노론이 정국을 장악했던 정조 즉위 전후에는 서로 실권을 장악하기 위한 방법으로 모반 및 역모 사건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이럴 때는 왕이 어떠한 태도를 취하는가도 중요하였지만, 때에 따라서는 왕을 제거해야할 필요성까지 생기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환관과 궁녀들이 꼭 개입되었다. 왕의 의중을 알아내는 일, 음식물에 독약을 넣거나, 왕자나 왕비가 병들어 죽기를 바라는 뜻으로 흉한 물건을 일정한 곳에 묻는 이른바 매흉(埋兇)의 실행자들은 대부분 환관과 궁녀들이었다.

그 구체적인 실례는 많다. 광해군때 영창대군 옹립 사건에는 선조의 총애를 받던 환관 민희건이 끼어있다. 민희건은 선조가 죽던 날 어필(御筆)을 본떠서 밀지(密旨)라고 속인 뒤 유영경(柳永慶)에게 내주어 영창대군을 보호하게 하였다. 인조때 광해군 복위운동에도 환관 배희도가 등장한다. 유호립은 궁내사람들과 짜고 궁중에 들어가 인조를 살해하고, 광해군을 상왕으로 삼고 인성군(仁城君) 이공(李珙)을 새로운 국왕으로 옹립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과정에서 군사가 서울에 도착하면, 환관 배희도에게 용사(勇士) 2인을 주어 인조를 시해할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경종때 박상검(朴尙儉)이란 환관이 있었다. 그는 충주(忠州) 박씨로 평안도 영변 사람이다. 어려서 바로 이웃집에 살고 있던 심익창(沈益昌)에게 수학하였다. 마침 김일경과 원휘(元徽)가 차례로 영변부사로 부임해 심익창의 집에 자주 드나들자 박상검도 이들과 친교를 맺게 되었다. 뒤에 이들의 힘으로 궁궐에 환관으로 들어갔는데, 그때는 김일경이 소론의 거두가 되어 있었다. 당시 조정의 신하들은 서로 붕당을 지어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헐뜯고 싸울 때인데, 김일경이 박상검을 조정에 환관으로 심어 놓은 것이었다.

그 동안의 흘러온 과정을 잠시 살피자면,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은 노론의 반대를 받았으나 소론의 지지를 받아 왕위에 올랐다. 그게 1720년이다. 하지만 병약했던 경종은 즉위한 지 1년 되던 해(1721년), 노론 대신들인 김창집·이건명 등의 요구를 받아들여 이복동생인 연잉군(후에 영조)을 왕세제(王世弟)로 삼고, 그에게 대리청정을 맡겼다. 당시 김일경과 박필몽을 필두로 한 소론측은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는 것을 저지하고 나섰다. 결국 경종은 다시 친정(親政)을 하고, 그해 음력 12월 김일경 등의 탄핵을 받아들여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영의정 김창집과 좌의정 이건명 등을 면직시키는 등 정국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이 무렵 김일경은 심복인 박상검을 이용해 노론의 지지를 받는 왕세제 연잉군을 아예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박상검은 김일경의 무리로부터 받은 은화 수천 냥을 이용해 먼저 궁내에 있는 환관과 궁녀들을 매수하였다. 반면 매수에 응하지 않는 노론계 환관들에게는 이간질하여 궁내에서 몰아냈다. 우선 자신의 편에 서지 않았던 환관 장세상(張世相)·고봉헌(高鳳獻)·송상욱(宋尙郁)이 그 쫓겨날 대상이었다.

소론을 지지하던 경종은 박상검 등의 고자질을 믿고 1721년(경종1) 12월 23일, 장세상을 경성부에, 고봉헌을 광양현에, 송상욱을 경상도 장기현에 유배시켜 버렸다. 이때 이들의 가족들도 연좌되었는데, 장세상의 가족인 장두명(張斗明)도 송상욱과 같이 장기현으로 유배되었다.

정적들을 제거한 박상검은 그로부터 한 달 후인 1722년 1월, 궁 안에 돌아다니는 여우를 잡는다는 구실로 청휘문(淸暉門)에 여우 덫을 놓고 함정을 파놓았다. 이로 인해 왕세제가 경종에게 문안을 드리거나, 아침저녁으로 진짓상 돌보러 가는 길이 가로막혀버렸다. 당연히 경종과 왕세제 사이에는 오해와 불화가 조성되었다. 이들은 대전(大殿)의 궁녀들에게 왕세제를 헐뜯는 말을 퍼뜨리도록 해 경종이 이를 믿고 왕세제를 제거할 수 있는 명목을 만들었다.

이 낌새를 눈치 챈 연잉군이 들고 나섰다. 그는 밤에 입직하던 궁관(立直宮官)과 익위사관(翊衛司官)을 불러 모아 놓고 환관 한두 명이 나를 제거하려 하니, 그들의 독수(毒手)를 피하기 위해 사위(辭位:왕세자의 자리를 사퇴)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튿날 아침 대신들의 주청으로 주모자를 국문하라는 경종의 명령이 떨어졌다. 예상외로 일이 커지자 소론의 영수이던 영의정 조태구, 같은 무리의 김일경 등은 시침을 뚝 떼고 모든 관련자들을 잡아들여 빨리 처벌하라고 길길이 뛰었다. 자신들의 음모가 탄로 날 것을 걱정하여 미리 관련자들을 잡아 처치해버리려는 심보였다.

서울 도봉구 초안산에 있는 내시 분묘군. ‘진짜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돌봐줄 후손 없이 잠든 내시 분묘군은 전혀 관리되지 않은 모습이다. 버려진 무덤 곁으로 부러진 비석과 목이 잘린 동자석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킨다.
서울 도봉구 초안산에 있는 내시 분묘군. ‘진짜 핏줄’이 아니었기 때문일까. 돌봐줄 후손 없이 잠든 내시 분묘군은 전혀 관리되지 않은 모습이다. 버려진 무덤 곁으로 부러진 비석과 목이 잘린 동자석이 쓸쓸하게 자리를 지킨다.

의금부에서는 환관 박상검과 문유도(文有道), 궁인인 석렬(石烈)과 필정(必貞)이 범인이라는 것을 알고 수사를 개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안 석렬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잡혀온 필정도 옥중에서 자살해버렸다. 박상검과 문유도에 대해서만 국문(鞠問)이 이루어졌으나, 이들은 끝내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버티기만 하면 김일경 등이 알아서 석방해 주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다. 관련자들을 추가로 잡아들여 심문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혐의가 확인되지 않았다. 1722년(경종2) 1월 4일, 문유도도 심문을 받던 도중에 목숨을 잃었다. 결국 그해 1월 6일, 박상검은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기도 전에 같은 계파인 소론의 관리들에 의해 능지처참 당하였고, 사건은 흐지부지 마무리되었다. 이를 두고 역사에서는 ‘박상검의 옥’이라고 한다.

결과적으로 박상검은 소론의 김일경 등의 사주를 받고 경종과 왕세제 사이에 불화를 일으켜 왕세제를 없애려 했지만 토사구팽이 되고 말았다.

소론의 이간질을 믿고 경종이 송상욱을 장기까지 유배 보낸 이유를 보면 옹색하기 그지없다. 유배형벌 중에서도 가장 중한 유3천5백리에 처한 이유가 고작 ‘잔소리가 너무 심하다는 것’이었다. 이런 처사에 대해서 신하들도 임금이 중도를 잃었다며 걱정을 하는 모습이 <경종실록>에 보인다.

송상욱과 장두명이 박상검의 계략에 밀려 장기로 유배 온 지 3년 후인 1724년에 경종이 죽었다. 재위 4년 만이었다. 경종이 독살되었다는 소문을 뒤로하고 이제 노론의 지지를 받던 연잉군이 영조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영조가 즉위한 그해 10월 19일, 송상욱은 해배되어 장기를 떠났다. 그 이듬해인 1725년, 김일경 등이 박상검의 배후로 지목되어 탄핵되었고, 환관 손형좌(孫荊佐) 등에 대한 국문이 이루어지면서 이 사건은 다시 노론과 소론의 대립 중심에 놓이게 되었다. 이 무렵인 1725년 4월 9일, 그제야 장기에 와서 3년 넘게 유배살이를 하던 장두명도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갔다.

뒤에 자세하게 논하겠지만, 신임사화란 것이 있었다. 노론은 신임사화를 주도한 조태구, 김일경, 목호룡(睦虎龍) 등을 공격하기 위해 이 사건에 대한 재조사와 관련자의 처벌을 주장했다. 결국 영조 때에 다시 쓰인 <경종수정실록>에는 “박상검(朴尙儉)이 김일경의 손발이 되어 은밀한 기회를 몰래 주선하여 안에서 해적(害賊)이 되어 안팎에서 선동하였다”라고 기록하였다.

해배되어 한양으로 올라간 송상욱은 다시 제시내관(祭侍內官)으로 복직되어 궁중생활을 이어 나갔다.

서울 도봉구 창동과 월계동 사이에 걸쳐 있는 초안산에는 내시들의 공동묘지가 있다. 사람들은 여기를 ‘내시내 산’이라고 한다. 장기로 온 송상욱이나 그를 모함하여 장기로 보낸 박상검이나, 그들의 신분이 내시였으므로 모두 이곳에 묻혔을 것이다. 산자락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내시들의 묘는 문인석 등의 석물들이 처참하게 나뒹굴고 있다. 누구나 이곳에 와 보면, 너무 많은 묘에 놀라고 허술한 관리에 한 번 더 놀란다. 무덤들도 봉분이 온전한 것은 거의 없고, 소나무나 아카시 나무들이 봉분 위에 자라고 있다. 한눈에 봐도 그 누구도 이 무덤들을 거의 돌보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특이한 모습은 여기 무덤과 석물들이 하나같이 서쪽을 향하고 있다는 것이다. 죽어서도 궁궐이 있는 서쪽을 바라보며 임금의 평안을 기원하기 위해서란다. 생식기를 잘려버린 것도 모자라 죽어서까지 충성을 강요당한 이들의 통곡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버리는 위정자들에게 희생된 영혼들이 아직도 구천을 헤매는지 을씨년스럽기조차 하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매년 가을이면 산 아래 마을 민초들이 후손이 없는 내시들을 위하여 제사를 지내주었다는 안내문 글귀에서 그나마 위안을 느끼는 것은 비단 나만이 아닐 것이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