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한 취급 받는 호박

단호박. 호박은 중국, 일본, 오키나와, 아라비아 등을 통해 복합적으로 전래되었다. 단호박은 최근에 전래된 것이다.
단호박. 호박은 중국, 일본, 오키나와, 아라비아 등을 통해 복합적으로 전래되었다. 단호박은 최근에 전래된 것이다.

호박, 억울하다. 호박은 좋은 농작물이자 식재료다. 가난한 농가의 소중한 구황작물이었다. 지금도 호박죽은 ‘비교적 귀한’ 대접을 받는다. 정작, 호박의 이미지는 그리 긍정적이지 않다. 못생긴 사람을, 특히 여자의 경우, 호박에 비교한다. ‘호박’이라고 부르는데 좋아하는 이는 없다.

호박은 수박과 경쟁한다. “호박에 줄 긋는다고 수박 되지 않는다”고 한다. 수박은 끼닛거리가 아니나, 호박은 양식이 된다. 덜 익은 수박은 먹을 수 없지만, 애호박은 식량이 된다. 전, 된장찌개에 쓴다. 우리도 수박을 귀하게 여긴다. ‘그까짓 호박’이라고, 호박은 낮춘다.

다산 정약용(1762~1836년)은 1801년 봄, 장기현(지금의 경북 포항 장기마을)으로 유배를 왔다. 220일. 다산은, 봄부터 늦가을까지 장기에서 귀양살이를 했다. 봄, 여름, 가을을 겪었다. 일곱 달 동안 장기의 바닷가 살림살이를 봤다. 글을 남겼다. ‘장기농가(長鬐農歌) 10장’에 호박과 수박이 나타난다(다산시문집 제4권_시).

(전략) 부슬부슬 새벽 비가 담배 심기 알맞기에/담배 모종 옮겨다가 울 밑에 심는다네/올봄에는 영양에서 가꾸는 법 따로 배워(今春別學英陽法)/금사처럼 만들어 팔아 그로 일 년 지내야지(要販金絲度一年)/호박 심어 토실토실 떡잎이 나더니만/밤사이에 덩굴 뻗어 사립문에 얽혀 있다/평생토록 수박[西瓜]을 심지 않는 까닭은/아전놈[官奴]들 트집잡고 시비 걸까 무서워서라네(후략).

몇 가지 사실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호박은 심되, 수박은 심지 않는다. 왜 그럴까? 호박은 트집을 잡지 않는다. 심든 말든 상관하지 않는다. 수박은 관(官)에서 시비를 건다. 수박은 과세대상이다. 관에서 트집을 잡는 이유는 간단하다. 호박은 농가 자체 소비지만, 수박은 환금작물이다. 내다 판다. 돈을 버는 작물은 세금을 내야 한다.

시의 앞부분에 ‘담배 농사’ 이야기가 있다. 영양현(경북 영양)이 담배 농사를 잘 짓는다. 영양의 담배 농사 비법을 배워서 좋은 담배(금사)를 만든 다음, 그걸 내다 팔고 싶다. 요량대로라면, 일 년 동안 쓸 돈을 마련할 수 있다. 담배나 수박 모두 환금작물이었다. 1801년 이전부터 이미 수박은 호박보다 귀하신 몸이었다.

1654년을 시작으로 대동법이 각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쌀이 세금의 기준이 되었다. 복잡했던 세금이 비교적 간편하게 정리되었다. 1791년(정조 15년), 신해통공(辛亥通共)이 시행되었다. 민간의 상행위가 상당히 자유로워졌다.

다산이 장기현으로 귀양을 온 시기는 신해통공 10년 후다. 여전히 세민(細民)들은 관청의 세금과 탐학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다산 정약용은 다른 시에서도 호박의 유용함을 이야기한다. ‘다산시문집_제1권_시’의 내용. 제목은 ‘호박을 넋두리한다[南瓜歎, 남과탄]’이다, 남과(南瓜)는 호박이다.

궂은비 열흘 만에 여기저기 길 끊기고/성 안에도 시골에도 밥 짓는 연기 사라져/태학에서 글 읽다가 집으로 돌아와/문 안에 들어서자 시끌시끌 야단법석/들어보니 며칠 전에 끼닛거리 떨어져서/호박으로 죽을 쑤어 허기진 배 채웠는데/어린 호박 다 땄으니 이 일을 어찌할꼬/늦게 핀 꽃 지지 않아 열매 아직 안 맺었네/항아리만큼 커다란 옆집 밭의 호박 보고/계집종이 남몰래 그걸 훔쳐 가져와서/충성을 바쳤으나 도리어 야단맞네/누가 네게 훔치랬냐 회초리 꾸중 호되네/어허 죄 없는 아이, 이제 그만 화를 푸소/이 호박 나 먹을 테니 더는 말을 말고/밭 주인에게 떳떳이 사실대로 얘기하소(후략)

마치 그림 같다. 다산은 1784~1789년 사이, 태학(太學,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이 시의 시기는 1785년 무렵이다. 다산은 ‘학생’ 신분이었다. 봉급을 받는 벼슬아치가 아니다. 성안이나 성 밖 시골 모두 밥 짓는 연기가 사라졌다. 굶는다. 다산의 집도 마찬가지다. 끼닛거리가 없으니 호박죽을 먹는다. 아마 늦여름, 초가을이었을 것이다. 애호박도 다 따버렸고, 늦게 핀 꽃은 아직 지지 않아 열매가 달리지 않았다. 계집종이 옆집 호박을 훔쳐 왔다. 호박은 소중한 구황작물이었다.

호박, 흔하다, 그래서 천하다?

창강 김택영(1850~1927년)은 조선 말기, 일제강점기의 학자, 우국지사다. ‘소호당시집_제3권_을유고’에 호박을 소재로 한 시가 남아있다. 제목은, 공교롭게도, 다산의 시와 같다. ‘남과탄(南瓜歎)’, 1885년(고종 22년) 지은 작품이다. 다산의 ‘남과탄’과는 딱 100년의 차이가 난다. 100년 뒤에도 호박은 여전히 구황작물이었다.

(전략) 올해 심은 호박은 씨가 좋지 못하여/헛되게도 많은 꽃들, 벌들만 길렀네/아침 내내 따고 따도 광주리 못 채우고/돌아와 처자식 대하니 면목이 없네/산중이라 고기라곤 맛볼 수 없고/어린 이들이나 먹을 호박뿐/온 가족의 실망 이미 매우 탄식스러운데/좋은 손님 방문하면 장차 어쩌랴 (후략)

호박은 언제 한반도에 전래되었을까? 조선 후기 실학자 성호 이익(1681~1763년)은 호박에 대해서 많은 기록을 남겼다. 성호는 스스로 호박 농사를 지은 적도 있다. 성호는, “호박은 100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대략 17세기 전반쯤이다. ‘성호사설_제6권_만물문’ 중의 내용이다.

호남 지방에는 소마(蘇麻)가 없고 다만 수유(茱萸)나무 열매로 기름을 짜서 등불을 켜게 된다. 남과(南瓜)라는 호박이 난 지도 또한 거의 백 년이 가까이 되었는데, 아직 호남 지방에는 미치지 못했으니, (후략)

소마(蘇摩)는 들깨, 수유(茱萸)는 산수유 열매다. 기름을 짜서 머릿기름 등으로 사용했다. ‘남과라는 호박이 난 지도 100년 가까이 되었다’고 했다. 호박은 임진왜란 이후 들여온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알 수 없지만, 당시 호남에는 호박 농사가 드물었다.

호박, 16세기에도 있었다

호박의 전래는, 성호의 주장보다는, 조금 빠를 가능성도 있다. 교산 허균(1569~1618년)의 ‘성소부부고_한정록_제16권_치농’에 호박 기르는 법이 등장한다. ‘한정록’은 1610년에 썼다가, 교산이 역모죄로 죽던 해인 1618년 재편집한 것이다. 17세기 초반이다.

동과(東瓜), 남과(南瓜)

먼저 젖은 볏짚재[稻草灰]를 부드러운 진흙과 뒤섞어 땅 위에 깔고 호미로 둑을 짓고서 3월에 하종하되, 그 씨앗의 거리는 서로 1치쯤 떨어지게 심은 다음 젖은 재[灰]를 체로 쳐서 덮어주고는 물을 주고 또 거름물을 주기도 한다. (중략) 덩굴이 길게 뻗으면 시렁을 매어 끌어올린다. 이는 오이 심는 법과 모두 같다.

동과(東瓜)는 동과(冬瓜)로 ‘동아’다. 크고 긴 열매로 껍질은 박 같다. 지금은 보기 힘들다. 동아나 남과(호박)을 기르는 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호박은 북쪽으로는 중국, 남방으로는 일본 큐슈, 오키나와, 동남아, 아라비아 등 다양한 루트로 들어왔을 것이다. 성호 이익의 또 다른 기록이다(성호사설 제5권_만물문_남과).

채소 중에 호과(胡瓜)란 것이 있는데 빛은 푸르고 생긴 모양은 둥글며 무르익으면 빛이 누르게 된다. 큰 것은 길이가 한 자쯤 되고 잎은 박[瓠]과 같으며 꽃은 누르고 맛은 약간 달콤하다. 우리나라에는 옛날엔 없었는데 지금은 있다. (중략)/요즘은 사대부(士大夫)들에도 이 호과를 심는 이가 많은데, 어떤 이는 이르기를, “‘본초강목’에 남과(南瓜)라고 했다” 한다/(중략) 남과라는 것도 있고 또 왜과(矮瓜)라는 따위도 있는데, 이 왜과란 것도 남과와 흡사하다. 빛깔은 한껏 누르고 생긴 모양은 둥그스름하고 길며 맛은 단 편이다. 지금 시골에 혹 심는 이가 있는데 이름을 당호과(唐胡瓜)라고도 한다. 남과에 비교하면 조금 잘기 때문에 심는 자가 많지 않으니, 이는 대개 서북 지방에서 들어온 것인 듯하다.

호박(남과)은 호과와 닮았다. 남과와 비슷한 왜과도 있다. 왜과는 ‘왜호과’라고도 한다. ‘호(胡)’는 아라비아, 중동이다. 당(唐)은 중국이다. 당호과는 아라비아,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것이다. 호박은, 호박죽처럼 뒤섞여 들어왔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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