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학승천혈 명당에 자리한 원적사 주법당. 원적사는 경북 상주시 화북면 우복동길 220-160에 위치해 있다. 

십여 년 전 원적사에 들렀던 적이 있다. 청정한 절의 경관보다 닳고 해진 소매끝과 천을 덧대 기운 젊은 스님의 승복 앞에서 가슴 서늘했던 기억이 또렷하다. 그 청빈한 산사의 이미지는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불자도 아닌 내가 산문을 쉽게 개방하지 않는다는 선원에 다시 가볼 기회는 오지 않았다.

무작정 원적사를 찾아 나섰다. 문경과 상주, 괴산을 끼고 있는 청화산 중턱을 향해 가파른 산길을 오르자 ‘청정수행도량이니 돌아가라’는 표지판이 가로 막는다. 절은 660년(신라 태종무열왕7년) 원효 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풍수지리설에 따르면 학이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비학승천혈(飛鶴昇天穴) 명당이라 예로부터 깨달음을 빨리 얻을 수 있는 수도처로 알려졌다. 학의 부리에 해당하는 크고 뾰족한 바위 아래 원적사(圓寂寺)라는 현판을 단 주법당이 좌선하듯 앉아 있다.

석가여래좌상이 봉안되어 있는 법당에는 불전함이 보이지 않는다. 제단 위에 발가벗은 지폐 한 장 올려놓기가 민망하다. 나의 공양은 정성스런 마음보다 그저 습관 같은 의식에 지나지 않았는지 모른다. 요사채에서 차담을 나누던 주지 스님이 소탈하고 쾌활한 얼굴빛으로 맞아 주신다. 가을빛 한 아름 안고 따라오던 숲이 그제서야 뒤로 물러나 앉고, 머지않아 이 골짜기도 짧고 깊은 사색의 계절로 접어들 것이다.

교통사고로 왼팔에 깁스를 한 채 보이차를 대접하는 범린 주지 스님은 오랫동안 알아온 사람처럼 어색하지 않고 편안하다. 형식적인 틀과 권위를 좋아하지 않는 스님은, 저절로 내면이 원숙해지고 중물이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 나오길 원하신다며 두루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신다.

승(僧)과 속(俗)은 하나일 수 없다. 그렇다고 온전히 분리될 수도 없기에 스님 노릇도 쉽지 않으리라. 공양주 보살을 두지 말고, 산방도 꾸미지 말고, 산문도 열지 말고 수행에만 전념하라던 서암 스님은 이제 벽에 걸린 사진 속에서만 환하게 웃으신다. 해우소 가는 길섶에는 때이른 가을이 선정에 들고, 나무들은 서로를 품고 기도하듯 온화하다.

부처님 오신 날만 산문을 여는 수행도량 봉암사와 50여 년 수좌로서의 품격을 잃지 않고 입적하실 때까지 지켜온 원적사, 두 사찰의 맑은 이미지 속에는 서암 큰 스님이 계신다. 나는 한 그루 갈매나무를 떠올린다. 백석의 시 속에서 하얗게 눈 맞으며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는, 곧고 의연한 아름다움을 지닌 갈매나무.

젊은 시절 토굴에서 지내며 용맹정진하셨다는 스님은 인도의 오르빌과 명상센터를 수차례 다녀온 경험담을 꺼내신다.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나의 인도여행기와 책에서 만났던 오르빌의 환상들을 뜻밖에도 산중에서 만나게 될 줄이야. 세계적인 지휘자 첼리 비다케와 폰 카라얀, 말러와 베토벤의 교향곡, 철학자 쇼펜하우어와 오쇼 라즈니쉬, 전문적인 깊이는 가늠할 수 없지만 스님의 해박한 식견은 쉬지 않고 이어진다. 어둠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 아침이 오도록 저린 걸음으로 걸었을 스님, 선정을 위해 곱게 물 들어가는 담쟁이덩굴의 안색조차 눈부시다.

조낭희 수필가
조낭희 수필가

잠시 전생의 습을 생각한다. 안간힘을 써도 털어내기 힘든, 일종의 굴레 같은, 그 업을 벗기 위한 노력을 나는 하긴 했던가? 스님은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정의감도 유별나다. 중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며 씁쓸해 하신다. 내 몸 하나 위로하며 살기도 바빴던 나를 원적사 가을빛이 말없이 다독인다. 보물 하나 없어도 원적사가 아름다운 까닭이다.

“불교는 종교를 넘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철학이지. 공부해야 시건방 들 새가 없어.” 스님의 말씀이 소슬하게 날아와 꽂힌다. 그것은 가난한 절 살림을 겸허히 받아들이며 수행하는, 서암 큰스님의 상좌다운 자존심이다.

산중 생활이 무섭지 않느냐고 여쭙자 “뭐가 무서워. 무서운 건 나지.” 우문현답이다. 어김없이 2시 50분이면 일어나 도량석을 시작으로 두어 시간씩 조석예불을 드리고 혼자서도 잘 논다던 스님은, 하루 30분이라도 명상하는 습관을 들이라고 당부하신다.

“명상이란 내 안에 침잠해 들어가서 실체, 즉 본체를 확인하는 작업이지. 명상을 하면 생각의 흐름이 잡히고 소중한 것과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리가 되거든. 아침에 명상하는 습관을 들여 보셔요. 습은 길들이기 나름이지. 모든 것은 내 의지, 마음 안에서 나오는 것이야. 끊임없이 변화하는 세상, 끊임없이 정진하는 길밖에 없어.”

“불자들이 찾아오면 좋은 말씀 좀 해달라는데 참 딱해. 이 세상에 좋은 얘기가 적어서 이 모양인가? 작은 것부터 실천할 수 있어야지.”

나의 허약한 의지가 댓돌에 벗어놓은 신발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 어떤 추임새도 넣을 수가 없다, 가까운 곳에서 가을이 익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행여 원적사가 궁금하여 청화산 가파른 언덕길 오르거든, 반야라는 이름을 가진 영리한 개와, 공부하기 좋아하는 스님 한 분을 찾아보라. 해우소 창틀로 들어오는 푸른 잡목 숲 닮은 스님이 그대를 반겨 맞을 것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