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소설가 김승옥의 단편 ‘서울, 1964년 겨울’에는 세 젊은이가 등장한다. 스물다섯 살 대학원생인 안(安)과 구청직원인 나, 서른다섯 살 가량의 월부 서적외판원이 포장 술집에서 우연히 만난다. 외판원이라는 사내는 그날 급성뇌막염으로 죽은 아내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다는 고백을 하고, 그 돈을 다 써버릴 때까지 같이 있어주기를 간청한다. 마지못해 함께 술을 마시고 화재현장 구경을 하고 밤늦게 여관에 들었는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그 외판원이 죽어 있었다는 내용이다.

제3공화국이 출범한 이듬해인 국민소득 103달러 시절었다. ‘뚜렷한 가치관을 갖지 못한 도시인들의 방황과 연대감 상실로 인한 절망’을 주제로 한 이 소설은 암울하고 께름칙한 분위기로 끝나지만 정치적 현실의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은 아니었다. 이른바 4·19와 5·16이라는 양대 정변을 겪은 후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젊은이들이 정체성의 혼란과 경제적 궁핍에서 오는 실존적 불안과 좌절을 앓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한 소설이었다.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2019년 가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쓴다면 어떤 캐릭터가 적절할까. 아마도 대다수가 요즘 연일 매스컴을 도배하는‘조국’ 일가와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더없이 좋은 소설거리라는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아니 ‘조국사태’ 그 자체가 어떤 소설보다도 더 극적이고 적나라하게 이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흥미진진한 한 편의 드라마다. 한 가지 더 흥미로운 사실은 일부 유명 소설가들이 ‘조국’을 비호하는 발언을 내놓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이란 냉철한 이성의 산물은 아니라는 반증이라고나 할까.

한 때 운동권에 속하기도 했던, 사회주의 성향의 한 인물이 국립대학 교수가 되고 마침내 법무부 장관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에서 노정하는, 우리 시대의 속살과 민낯은 대다수 서민들에게 적지 않은 충격과 배신감을 안겨준다. 강남좌파로 불리는 기득권층의 실상과 내면세계에 대해서는 심도 있는 분석과 새로운 조명이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 그들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과 그로 인해 형성된 세력이 국가의 존망을 좌우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그들이 공평과 정의라는 명목으로 포장한 사회주의적 이념을 맹목적으로 신봉하고 추종하는 무리들이 떠받치고 있는 기득권의 위험성이 도처에 불거지고 있는 현실이다.

현 정권을 장악한 좌파세력은 사회주의적 이념을 실현하겠다는 의지와 행동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고, 그런 시책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색깔론이니 냉전논리니 하는 프레임을 씌우거나 적폐로 몰아 속박하기를 서슴지 않는다. 때마침 ‘조국사태’가 터져서 그들이 내세우던 공평과 정의가 위선과 가식이었다는 게 밝혀져 분노와 원성이 높아지고 있다. 결국 국민들 각자가 깨우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러기 위해서는 좌우 편향의 정권이 여러 번 뒤집혀야 한다. 그래서 어느 쪽이든 맹목적인 진영논리의 추종이나 고정관념이 허망하다는 걸 체득해야 한다. 태풍 ‘타파’가 지나가고 다시 날이 갰다. 이 가을 우리 정국에도 모든 악습과 불의를 타파하고 공명정대한 계절이 오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