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캐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865년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모험(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초판에 들어 있는 삽화.

문학에 있어서 ‘환상’은 예로부터 중요한 주제였다. 사실, ‘환상’ 말고 달리 더 문학적인 주제가 존재하기나 할까. 우리 모두가 좋아하는 이야기란 ‘여기’, 현실적 세계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 여백 어딘가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비현실의 세계에서 일어났을지도 모르는 환상에 대한 이야기니 말이다.

이처럼 어린 시절 누구나 매료되기 마련인 환상이야기 가운데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 1832~1898)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빼놓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아직도 이 작품을 처음 열어보았을 때 경험했던 최초의 당혹감과 이어 찾아온 그 세계에 대한 매혹을 기억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세계는 아직도 내 마음 어딘가 한 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누구나가 그러했을 것처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 1865)’에서 ‘거울 나라의 앨리스(Through the Looking-Glass, 1871)’로 이어지는 루이스 캐럴이 만들어낸 앨리스적인 세계가 그토록 특별하게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은 별다른 이유는 아니다. 인간의 이성이 중심이 되는 근대 세계와 표준시로 대표되는 일말의 여백도 존재하지 않는 동조화된 세계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운 여백의 사고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따분한 역사공부를 하던 앨리스는 ‘늦었다’‘늦었다’고 외치는 조끼를 입은 토끼를 발견하고 그를 따라가다가 환상의 세계로 굴러 떨어진다. 우리의 정신은 조금의 실마리라도 눈앞에 나타나면 그 실마리를 따라 제멋대로의 상상의 세계로 떠나가 버리지 않는가. 그것이 따분한 공부를 하는 와중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렇게 ‘꿈’과 ‘거울’이라는 근대 세계의 두 가지 여백을 통해 만들어진 환상의 세계에 굴러 떨어진 앨리스는 현실의 답답한 규칙성이 아니라 완전히 독자적이고 환상적인 규칙의 지배를 받는 세계를 모험한다.

이렇게 자신의 눈앞에 존재하는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세계를 여행하는 앨리스의 모험이 흥미로운 것은 그것이 새로운 환상적 세계의 규칙을 발견하는 인간의 태도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환상이 환상으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은 그것이 단지 지금까지 본 일이 없는 기괴한 것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그것이 어떤 규칙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우리가 잘 알 수 없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와 유사한 규칙을 가지고 단지 창조된 세계에서 일어난 기괴한 소재만으로 만들어진 환상 문학은 그것을 보는 인간에게 당혹감을 줄 수 없다.

작가 루이스 캐럴의 본명은 찰스 럿위지 도지슨으로 작가이자, 수학자이기도 했고, 성공회의 집사이기도 했다.
작가 루이스 캐럴의 본명은 찰스 럿위지 도지슨으로 작가이자, 수학자이기도 했고, 성공회의 집사이기도 했다.

자신이 마주친 이전까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세계 속에서 앨리스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목적도 없이 그저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그 세계를 경험한다. 세계의 규칙을 알 수 없으니 그 경험은 이성적으로 주어지지 않는다. 무엇이든 입안에 넣어보지 않으면 대상을 알 수 없는 아기처럼. 앨리스는 실제로 먹어보지 않으면 효과를 알 수 없는 약을 먹어보기도 하고, 말을 하는 기괴한 대상들과 만나 그들과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한다.

결국 루이스 캐럴의 ‘앨리스’는 진정한 환상의 이야기이자 낯선 세계에 던져진 아이가 세계의 규칙을 이해해나가는 경험에 대한 알레고리다. 어른이 된 사람은 결코 아이가 세계를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실 세계의 여백에서, 그렇게 우리는 가끔씩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해 매혹되어 붙들린다. 아마 그것 없이는 문학도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