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경북대 교수·노문학
김규종 경북대 교수·노문학

얼마 전 ‘무등공부방’에서 장편소설 ‘빨치산의 딸’(1990)을 쓴 정지아 작가의 강연을 들었다. ‘기억’에 대한 그녀의 생각은 단출하되 선명하다. 빨치산이었던 어머니가 올해로 94세가 되었는데, 그이의 기억에 자리한 장면은 200개 남짓이라 한다. 90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온, 그것도 한반도 남단의 피어린 상처를 경험한 인간이 체화한 기억의 총량이 그것뿐이라니.

“여러분도 살아온 날들의 기억을 헤아려 보세요!” 작가의 말이 새삼스레 다가온다. 대단한 기억력은 아니지만, 나는 세 살적부터 경험한 기억에서 출발할 것이다. 문제는 기억이 반드시 정확하지 않으며, 기억이 경험의 총량을 보존하지도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이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단편소설 ‘덤불 속’에서 인간의 선택적 기억과 경험의 왜곡을 적나라하게 들춰낸다. 그것을 바탕으로 구로사와 아키라는 영화 ‘라쇼몽’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럼에도 기억의 힘은 단단하고 강력하다. 설령 왜곡되고 굴절된 기억이라 하더라도 기억이 가지는 힘은 대단하다. 어쩌면 그래서 아흐마토바는 “태양에 관한 기억이 흐려져 간다”고 아쉬워했는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남자와 엮이지 않은 청춘의 아쉬움과 미련을 감상과 낭만의 영탄으로 교직(交織)한 아흐마토바. 사랑의 올가미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20대의 지독하게 아름다운 슬픔과 기억을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 사이로 퍼져 나가는 햇살에 의지한 그녀.

무상한 자연이 늦가을에서 겨울로 접어들 무렵 페테르부르크의 운하를 서성대면서 아련하도록 애틋한 지난 일을 추억하는 아흐마토바. 그녀를 둘러싼 자연과 사물의 변화에 눈길을 주면서 자신의 헛헛한 내면세계를 돌이키는 시인. ‘그의 아내가 되지 않았음’을 그녀는 오히려 다행으로 여기지만, 한여름을 시뻘겋게 달구던 태양에 관한 기억은 점차 시들어간다. 암흑과 겨울이 하룻밤 사이에도 닥칠 것을 예감하는 우울하고 고적(孤寂)한 아흐마토바. 그녀는 어떤 경험을 ‘그’와 공유하고 있을까?! 언제 어디서 그와 만나고, 어떤 과정을 거쳐 그와 작별하여 오늘에 이른 것일까. 그녀가 기억하는 경험의 무게와 색깔은 그가 경험한 사랑의 색깔과 무게와 동일한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녀처럼 그 역시 선택적 기억과 그에 따른 독자적인 경험의 세계에 자리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기억의 세계에 빠져드는 순간, 우리가 경험한 모든 것은 각자도생의 길을 걷기 마련이다.

‘나한테는 얼마나 많은 기억이 내재하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찾아든다. 언젠가 나 또한 켜켜이 쌓여있는 기억의 씨줄과 날줄을 찬찬히 엮고, 상상력과 통찰에 기초하여 기나긴 이야기를 풀어볼 요량이다. 문학은 기억이 전부는 아니다. 하지만 기억이 배제된 문학은 없다. 그런 까닭에 공상과학소설과 무협은 아직도 문학의 범주 밖에서 맴돌고 있다.

기억을 배제하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아니다.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죽어도 잊히지 않을 경험과 기억이 있다. 그것의 색깔과 무게가 어떠하든 우리는 최후의 그날까지 기억과 함께한다. 그래서다. 우리가 과거를 물어야 하는 까닭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