⑭ 경북 바닷길에 숨은 보석 같은 맛집들

울진 죽변항 ‘돼지식당’의 생대구탕.

여행을 갈 때면 먼저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놓는 편이다. 계획을 세울 때부터 여행을 벌써 시작하는 아름다운 ‘들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진작 그곳에 가 내게 손짓한다. 궁금한 곳의 날씨를 검색해보는 순간, 이미 나는 여행지로 몇 걸음 나아가게 된다. 그런데 지난 계절 경북 바닷길 여행은 정말 아무것도 계획하지 않고 ‘무작정’ 떠났다. 잠잘 곳도, 밥 먹을 곳도 정하지 않고 간 여행이었다. 구경거리야 스마트폰으로 검색하면 금방 찾아갈 수 있고, 잠은 아무데서나 자면 그만이다. 문제는 식도락이었다. ‘맛집’을 검색하면 되지 않느냐고 누군가는 묻겠지만, 인터넷에 ‘맛집’으로 소문난 식당, 화려한 방송 출연 경력을 내세우는 집을 나는 신뢰하지 않는다. 사전 계획을 세울 때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식당 선택이다. 그렇게 공들여 찾아간 집들은 대부분 만족스러웠다.
 

울진·영덕에선 시원하고 칼칼한 국물
포항서는 머릿고기 묵직한 맛 대만족
‘힙’한 음식점 많은 경주에서 찾은 보석
‘황오실비’에는 애주가 위한 안주 가득

고민이 깊어져 갔다. 경북 바닷길 537㎞, 그 아득한 푸른 길에서 파도처럼 밀려올 허기를 무엇으로 채워야 할까? 몸이 여행 중임을 알아차린 혀는 더욱 까다롭고 예민하게 미뢰를 세워 ‘아무거나’와 ‘대충’을 절대 용인하지 않을 텐데…. 우리는 ‘아무거나’와 ‘대충’을 거세게 거부해야 한다. 음식뿐만 아니라 의식주와 여행, 취향과 관련된 모든 선택의 순간마다 그래야 한다. 아무거나 대충 입고, 먹고, 보는 사람은 자기결정권을 스스로 포기한 피동적 객체로 삶을 살아가게 된다. 늘 같은 것만 먹는 사람, 늘 똑같은 옷만 입는 사람도 취향의 확장을 통해 감각을 쇄신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자칫하다가는 자기중심적이고 변화에 유연하지 못하며 타인을 존중하지 않는 ‘꼰대’가 되기 쉽다 자기에게 익숙한 것, 편한 것만을 추구하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직된 태도를 버려야 한다. 여행은 낯설고 새로운 세계와의 만남이다.

아무거나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감각이 곧 사고 작용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감각은 체험이 되고 체험은 지식이 된다. 익숙한 감각은 익숙한 생각, 늘 똑같은 사고밖에 할 수 없게 하지만 낯선 감각, 새로운 감각은 우리의 사고 체계에 혼돈과 충격을 일으키며 신선함을 불어넣는다. 낯선 감각에 우리 몸이 반응할 때, 사고 작용도 활발하게 활성화된다. 그걸 기대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계획도 세우지 않고 경북 바닷길 여정에 오른 무모함 말이다. 어쩌면 나는 계획을 세우면서 나도 모르게 내 취향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아왔는지도 모른다. 입맛이란 수시로 변하기 마련인데, 계획표대로 정해진 식당 문만 열고 들어가면서 더 나은 미식의 가능성을 스스로 차단시킨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이번엔 철저하게 내 몸이 보내는 신호에만 집중해 식당을 찾아가보기로 했다. 감각이 가리키는 곳, 내 미각과 후각, 향미 본능을 끌어당기는 집에 무작정 들어가기로 했다. 경북 바닷길을 쏘다니는 동안 정말 그렇게 했다. 하루 세끼 중 한번은 꼭 인터넷 검색에 의지하지 않고 ‘감’으로 선택한 식당에서 먹었다. 대만족이었다. 서울 사람이 흔히 갖는 경북 음식에 대한 편견이 싹 사라졌다. 내게 우연한 미식의 기쁨을 선물한 집들은, 현지인들만 아는 ‘숨은 진주’였다.

영덕 ‘나비산 기사식당’의 미주구리찌개.
영덕 ‘나비산 기사식당’의 미주구리찌개.

울진 죽변항에는 생대구탕을 전문으로 하는 ‘돼지식당’이 있다. 죽변항 수협 직판장 앞에 자리한 이 집은 울진 지역 언론에 몇 차례 소개된 바 있으나 외지 사람들에게는 아직 생소하다. 울진 주민들에게 오랜 시간 사랑받아 온 이 대구탕의 명가는 죽변항 근해에서 갓 잡은 싱싱한 생대구를 무와 미나리, 파 등과 함께 맑은 국물로 끓여낸다. 한 숟가락 뜨는 순간 나는 무릎을 치며 후회했다. “어제 술을 마셨어야 하는데!” 나도 모르게 내뱉은 혼잣말의 볼륨이 좀 컸는지 다른 손님들이 깔깔 웃었다. 그 웃음은 곧 ‘당신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공감의 표시였다. 속풀이에 이보다 더 좋은 음식은 없을 것이다. 맑고도 뽀얀 국물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끓으면, 탄탄한 대구살 한 점 크게 발라 국물과 함께 숟가락으로 떠먹는다. 구수하고 담백한 국물 맛과 탱글탱글한 생선살의 식감, 뜨끈한 온기, 몸에 찌든 때를 깨끗하게 씻어주는 듯한 시원함을 동시다발적으로 감각하는 순간, 죽변은 애인이 없어도 눌러앉고 싶어지는 애틋한 마을이 된다.

영덕 강구항에는 미주구리(물가자미) 식당이 여럿 있다. 그 중 청송식당은 미주구리회를 잘하는 노포, 지난번에 다녀왔으니 이번엔 ‘나비산 기사식당’에 가 볼 차례다. 강구항 삼사사거리 입구에 자리한 생선찌개 전문점이다. ‘나비산’은 영덕 오포읍의 작은 산 이름, 높이 152m의 산은 그 형세가 나비 모양을 닮았는데 정상에서 강구항 전경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다. 산 이름을 딴 식당은 규모가 꽤 크고 주차장도 널찍해 찾아가기 편하다. 자리에 앉아 미주구리찌개를 시켰다. 정갈한 밑반찬들이 먼저 나오고, 곧 보암직하고 먹음직스러운 찌개가 가스버너에 올랐다. 매콤하고 칼칼한 빨간 국물은 약간의 점성을 지녀 걸쭉한 식감을 낸다. 넉넉히 들어 있는 미주구리 살을 무, 두부와 함께 건져내 흰 쌀밥에 얹은 후 국물 쓱쓱 비벼 한 입 크게 떠먹으면,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입 안에서 화려한 축제 한창이다.

포항 죽도시장에는 소머리곰탕 집들이 즐비하다. 유명한 집은 ‘장기식당’과 ‘평남식당’, 두 집 모두 문전성시라 주말에는 줄을 서 기다려도 못 먹고 돌아서기 일쑤다. 그럴 때 훌륭한 대안이 있다. 곰탕 골목이 있는 시장 초입에서 수산물 매대가 늘어선 어판장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폐백 및 이바지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가게들이 있다. 그 중 한 집인 ‘울릉도식당’에서는 단돈 만원으로 푸짐하고 맛있는 한 끼 식사를 할 수 있다. 나는 이 집에 올 때면 뭉텅뭉텅 썰어낸 머릿고기와 누른 머릿고기(편육)를 각 한 접시씩 시킨다. 뽀얀 곰국 한 뚝배기는 무려 서비스다. 어느 겨울날 이 집에서 머릿고기 먹는데 주인 할머니가 울상이다. 송해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그런 가짜 뉴스가 가끔씩 인터넷에 돌 때가 있다. 일이 손에 안 잡힌다며 침울해 하는 할머니께 “아니에요. 헛소문이랍니다. 안돌아가셨어요.” 말씀드리자 그제야 가슴 쓸어내리며 “만우절도 아닌데 왜 거짓말해!” 옆집 아주머니에게 버럭, “악성루머란다. 사이버 수사대가 잡아간단다!” 옆집 아저씨에게 버럭, “건강하단다! 어이고 오래 살겠다” 혼잣말하신다. 나는 그만 파안대소하고 말았다.

포항 죽도시장 ‘울릉도식당’의 머릿고기 한 상. 단돈 만원.
포항 죽도시장 ‘울릉도식당’의 머릿고기 한 상. 단돈 만원.

경주 ‘황리단길’에는 요즘 말로 ‘힙’한 음식점들이 많다. 대부분 피자, 파스타 등 양식 내지는 한우 갈비, 불고기 등을 판다. 맛은 있지만 특색이 좀 약하다. 황리단길에 아쉬운 점은, 너무 세련된 나머지 늦은 저녁 술 한 잔 생각에 침이 고이는 애주가가 갈 만한 ‘허름한’ 대포집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황리단길을 지나 황오동에 가면 애주가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집, ‘황오실비’가 있다. 닭발, 오징어볶음, 곱창전골, 동태찌개 등 맛깔난 안주들이 많지만 그 중 압권은 홍어삼합이다. 경주에서 홍어삼합을 먹게 될 거라고 상상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삭힌 홍어를 돼지고기, 그리고 묵은지와 함께 먹으니 탁주 한 사발이 금세 비워졌다. 계란프라이 한 접시를 추가로 시키곤 ‘감격의 눈물’을 흘릴 뻔했다. ‘겉바속촉’하게 반숙으로 익힌 계란프라이가 접시에 수북이 쌓여 상 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우현 고유섭은 “경주에 가거든 관광 다니지 말고 대왕암을 찾으라”고 했는데, 나는 그 말을 이렇게 바꾼다. “경주에 가서 술 생각이 나거든 황오실비를 찾으라”라고.

서정주는 “바닷속에서 전복 따는 제주해녀도 제일 좋은 건 님 오시는 날 따다 주려고 물속바위에 붙은 그대로 남겨둔단다”(‘시론’)라고 노래했다. 물속바위에 붙은 제일 좋은 전복을 따다 드리는 마음으로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숨은 맛집’을 소개했으니, 경북 바닷길을 여행하는 그대여, 부디 “아무거나 대충” 드시지 말기를!     /시인 이병철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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