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포니아 주에서 네바다 주로 넘어가 들어간 곳은 라스베이거스, 도박의 도시였다. 우리가 머무른 곳은 피라미드 모양을 흉내낸 호텔, 그래서 그런지 안에서 길 잃어버리기 딱 좋았다.

강행군 여행 탓에 내일이면 당장 애리조나 그랜드 캐년으로 떠난다니 여기서 ‘한 재산’ 날릴 기회는 오늘밖에 없었다.

도박도 재미없고 마굴 구경도 재미없고, 그래도 낮밤이 뒤바뀌어 잠은 않고, 새벽에 억지로 일어나 도박장에 내려가 룰렛 게임 구경하다 심심풀이로 울긋불긋 동그란 원판이 돌아가는 기계 앞에서 손가락 튕기다 아침을 맞는다.

버스는 또 다시 광야를 달린다. 나라가 아름답다기보다 넓디 넓은 황무지다. 미국은 윤택하다고들 말하는데 그 대신에 끝없이 이어지는 메마른 황야, ‘사보텐’ 선인장 풍경이다. 철 들기 전 어릴 적에 나는 이 일본말 ‘사보텐’을 만화책에서 배웠다. 카우보이들이 마차를 타고 선인장 삐죽삐죽 솟아난 광야를 달리는 만화는 도대체 왜 1970년대 중반의 우리 만화책에 등장했던 것일까. 가이드 분이 갑자기 노래를 틀어준다. “카우보이 아리조나 카우보이 광야를 달려가는 아리조나 카우보이 말채찍을 말아들고 역마차는 달려간다 저 멀리 인디언의 북소리 들려오면 고개 너머 주막집에 아가씨가 그리워 달려라 역마야 아리조나 카우보이” 1959년에 파라마운트레코드에서 찍어낸 유성기판에 가수 명국환의 이 노래가 들어 있었다 한다. 6·25 전쟁으로 미국이 이 나라의 시장과 영화관과 군사도시를 휩쓸고 있을 때 이 ‘이국종’ 노래도 꽤나 인기몰이를 했다는 것이다. 황야를 달리며, 나는, 윤택함보다 이 광활한 황무지, 희박한 인구밀도가 더 무섭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영원히 알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는 나는 너무 나이들고 너무 오래 작은 나라 안에서만 살았던 것이다.

잠깐 원고에 한눈 파는 사이에 버스가 그랜드 캐년 지역으로 들어선다고 한다. 어디가? 어째서 그랜드 캐년이란 말이야? 땅가죽이 양옆으로 좍좍 갈라지고 천길, 만길 낭떠러지가 코앞에 박두해 있어야 하는 것을. 그러나 있다. 버스 주차장에서 내려 몇 걸음 앞으로 나아가자 갑자기 측량할 수 없는 광대한 단층이 모습을 드러낸다. 육백만 년 동안의 지질학적 활동과 콜로라도 강의 침식 작용이 만들어낸 장대한 결과물. 이런 것이었나? 나는 이쪽 땅끝에 서서 저쪽 건너갈 수 없는 ‘피안’의 땅을 바라본다. 부연 저편 절벽은 무슨 스크린화처럼 공중에 떠 있다. 왔다. 오기는 왔다. 영영 이런 곳에는 못 올 줄 알았는데. 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일까.

낭떠러지 끝에 꼼짝 않고 서서 생각한다. 나는 이편에 아직은 살아있는 것이라고.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