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무늬 그리고 김종원
상처와 무늬 그리고 김종원
  • 등록일 2019.09.08 19:16
  • 게재일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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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김도형 아시아퍼시픽해양문화연구원 이사

상처 많은 나무가 아름다운 무늬를 남긴다는 말이 있다. 사람의 경우는 어떨까? 상처 없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상처를 입지만 그 고통을 견디며 살아가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든 상처가 아름다운 무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처가 아름다운 무늬가 되고 세상에 향기를 전하는 삶은 극히 드물다.

포항 동빈동에 흰색의 아담한 목조건물 하나가 있었다. 따듯한 정감과 품위를 느끼게 한 그 건물은 선린병원이었다. 선린병원은 단순히 하나의 병원이 아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와 개인사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전쟁으로 초토화돼 수많은 전쟁고아들이 길거리를 헤매고, 홀로 된 산모들이 흐느끼고 있는 포항에서 그들을 치료하고 섬기는 사명이 선린병원의 뿌리다. 그 사명을 깨달아 병원을 헌신적으로 이끌고 키운 사람이 김종원이다.

그는 1914년 평안북도 초산군에서 태어나 평양의전을 졸업하고 평양의대 소아과에서 근무했다. 6·25전쟁이 터지고 월남해 대구 동산기독병원에 있던 중 전쟁고아들을 무료 진료하는 미해병대 기념 소아진료소가 포항에 만들어지면서 진료소를 이끌 적임자로 추천을 받게 된다. 그는 온몸을 바쳐 전쟁고아뿐만 아니라 오갈 데 없는 산모들의 진료를 맡았다. 한국 최초의 모자보건 활동을 펼친 것이다. 이 진료소는 김종원의 정성이 밑거름이 돼 선린병원으로 성장하게 된다. 그는 의사로서 얼마든지 편하게 살 수 있었지만 30년 된 텔레비전과 냉장고를 사용하는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그의 삶에는 깊은 상처가 있었다. 남쪽으로 올 때 북에 세 아들이 남아 있었다. 피난 올 때 갓난아기였던 넷째 아들은 경기고 진학을 위해 서울 하숙집에 머물다가 연탄가스에 중독돼 숨을 거뒀다. 2007년 3월 김종원이 영면하자 조문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하관식 때 그의 품에서 자란 많은 고아들이 눈물을 흘렸다. 포탄의 웅덩이에서 놀던 고아들은 북에 두고 온 그의 아이들로 보였겠지만, “예수님의 다른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선린병원 원장 이임사에서 고백했다. 김종원은 감내하기 힘든 상처를 견뎌내며 이웃들에게 감동의 인술을 펼쳤다.

인산(仁山) 김종원의 삶은 성산(聖山) 장기려의 삶과 여러모로 겹친다. 장기려는 1911년 평안북도 용천군에서 태어나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일본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전쟁통에 월남한 후 부산 영도에 병원을 세워 피난민을 무료 진료했고,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도 치료받을 수 있는 기틀을 만들었다. 그 또한 이산가족이었다. 월남하면서 아내와 네 자녀는 북에 두었고, 차남만 데리고 부산에 정착했다. 노년에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집 한 칸 없이 소외된 사람들을 섬긴 작은 예수였다.

배금주의가 횡행하는 시대, 인산과 성산의 삶은 인간의 상처와 그 상처를 극복하면서 만들어간 무늬의 의미를 묻게 한다. 부산에는 장기려를 기념하는 센터가 있고, 곳곳에 그의 자취가 남아 있다. 포항에서 김종원의 흔적을 찾아보기는 쉽지 않다. 선린, 그 아름다운 이름으로 초토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보살핀 동빈동에 그의 고귀한 삶을 기리는 작은 표지석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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