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은 강한 폭풍우를 동반하는 자연현상을 말한다.

한국과 일본의 무역 갈등으로 감정이 격하다. 이런 가운데 최인훈의 ‘태풍’의 일독을 권한다. 이 작품은 1973년 1월 1일부터 10월 13일까지 243회에 걸쳐 ‘중앙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이다. 1940년대 아시아·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 소설의 줄거리는 이렇다.

주인공인 오토메나크는 나파유의 장교이긴 하지만, 사실 애로크인이다. 그는 오랫동안 니브리타의 식민지였다가 나파유의 식민지가 된 아이세노딘에서 포로감찰 임무를 맡고 있었다. 그의 충직함과 충성심을 아는 상부에서 오토메나크에게 중요하고 긴요한 임무를 맡긴다. 그것은 아이세노딘의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지도자인 카르노스를 보호감찰하는 일이며, 카르노스를 포함하여 40명의 니브리타 포로들을 나파유와 아이세노딘의 휴전을 위한 조건으로 석방 및 호송하는 임무다. 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오토메나크는 우연히 니브리타인이 숨겨놓은 비밀창고에서 비밀문서를 발견하게 되고, 이를 통해 니브리타가 아이세노딘을 지배하면서 벌였던 만행을 소상히 알게 된다. 오토메나크의 생각은 여기에서 자라나 나파유의 지배방식 역시 니브리타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며, 자신이 그토록 신봉했던 나파유의 지배담론이 지닌 허위와 모순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하여 오토메나크는 자신이 그동안 잊고 있었던 아니 일부러 잊으려고 했던 사실, 피식민지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후 오토메나크는 카르노스의 독립 전쟁에 동참하여 아이세노딘를 독립시키는데 독립투사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태풍>의 주요 무대는 아이세노딘이며,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나파유의 장교인 오토메나크다. 세계 어디에도 아이세노딘이나 나파유란 나라는 없다. 완전히 가상적 공간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의 첫머리에서 서술자는 “유럽인들이 극동 혹은 동북아시아라고 부르는 지역”이 나타나는데, 여기에는 “아니크, 애로크, 나파유라고 불리는 세 나라”가 모여 있으며, 그 중 아니크는 “지구 표면의 4분의 1을 차지하는 큰 대륙”이며, “에로크는 그 동쪽 끝에 붙은 반도이며, 나파유는 이 반도를 활 모양으로 바라보는 몇 개의 섬”으로 된 나라임을 밝히고 있다.

이 가상의 나라들은 실제의 지명과 공명하고 있다. 아니크는 중국, 애로크는 한국, 나파유는 일본에 해당한다. 이러한 이름들은 철자순서를 바꾸어 이름을 아나그램(angram)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 원래의 이름은 다음과 같다. “‘아이세노딘’은 ‘인도네시아’를 거꾸로 표기한 것이며 ‘로파그니스’는 ‘싱가포르’이며 ‘나파유’는 일본이며 ‘애로크’는 ‘코리아’(한국), ‘오토메나크’는 ‘가네모도’(금본)이다.

이 공간속으로 ‘태풍’이 불어온다.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태풍’은 몇 가지 의미를 내함하고 있다. 먼저, 이 소설의 말미에서 오토메나크가 탄 배를 전복시키고 표류시키는 실질적인 위력을 지닌 일반적 의미의 ‘태풍’(颱風)이 그 하나다. 둘째 오토메나크의 인식론적 전환을 의미하기도 한다. 식민모국의 지배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오토메나크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발견하게 되면서 인식론적 혼란을 겪게 되는데, ‘태풍’은 그러한 혼란과 그로 인한 인식의 전복을 상징한다. 셋째 ‘태풍’은 개인의 인식 전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질서를 전복시키는 힘으로 형상화된다. ‘태풍’이 지나간 후 강대국이 약소국을 지배하는 부조리한 상황은 약소국의 동맹을 통해 극복된다. 이를 종합해보자면 ‘태풍’은 주인공의 철저한 자기반성을 의미하며 이를 통해 새롭게 세계질서를 재편해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재되었을 때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여전히 이 소설은 파격적이다. 왜냐하면 친일과 반일, 협력과 저항의 이분법적 구조에 문제를 제기하며 그것으로 이해될 수 없는 복잡하고 복합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독일과 일본을, 승전국인 미국과 영국을 등치시킨다. 미국을 위시한 서방의 열강은 정의를 지키고 세계 평화를 유지한 국가가 아니라 단지 독일이나 일본과 다를 바 없이 식민지를 지배했던 국가라고 말한다. 영국과 미국이 보기에 독일과 일본은 파쇼적 전체주의 국가라면, 일본의 관점에서 미국과 영국은 귀축(鬼畜)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과 영국을 위시한 서방의 열강은 전쟁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선(善)의 자리를 차지했을 뿐인 것이다.

1990년대까지도 일본문화는 한국에 들어오지 못했고, 일본을 조금이라도 옹호하는 말을 하면 ‘친일파’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아직도 한국과 일본의 스포츠 경기는 ‘한일전(韓日戰)’으로 불리며 관중들은 전쟁에 참여하듯 응원을 보낸다. 그런데 최인훈은 한일협정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었던 1970년대에, 일본과 미국을 동일선상에서 다루었다. 한국을 전쟁의 포화 속에서 구했으며, 우리나라에 원조를 아끼지 않았던 영원한 우방인 미국 역시 제국주의 국가이며 식민모국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각은 당대를 훌쩍 뛰어넘고 있다.

식민지를 거느렸던 국가들과 식민지배를 당했던 국가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탈식민주의 이론이 성행하면서 일반적인 것이 되었다. 탈식민주의는 1960년대 파농, 에드워드 사이드 등 많은 지식인들이 참여하면서 한 시대를 휩쓴 문학연구 방법이자 문학이론이다. 이 이론은 1990년대에 우리나라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이 작품은 탈식민주의가 우리나라에 소개되기도 전에 탈식민주의를 관통해버린다. 많은 훌륭한 작품이 그러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