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도 운문사 비로전.
청도 운문사 비로전.

지난 밤 꿈에 그가 하얗게 핀 파꽃을 안고 찾아왔다. 안부를 물어야 하는데 그만 가위에 눌려 잠을 깨고 말았다. 더 이상 잠들지 못하고 정원으로 나갔더니 젖은 달빛아래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넘쳐흐른다. 잔디밭이나 바위 틈, 담장 너머 빈터의 강아지풀숲까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울어댄다. 생의 가장 눈부신 한 때를 위한 이 장엄한 합창들이 나를 숙연하게 한다.

고요의 겹을 벗고 아침이 열리는 시간, 운문사로 향한다. 미처 가슴 속에서 떠나보내지 못한 것들과의 재회는 세월이 흘러도 아름답다. 그런 기억들이 사라질까 두려워 우리는 가슴 속에 애틋한 시구 하나 쯤 만들어 두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닐까. 비록 그 때는 힘들었다 할지라도.

운문댐의 수위와 물빛은 계절마다 달랐고, 봄날의 벚꽃은 언제나 내 늑골 사이에서 통증을 일으키며 피고 졌다. 보슬비의 속삭임이나 여름날 폭풍우의 거친 숨결조차 나를 위무하던 곳, 크고 작은 외로움이 방점처럼 찍히는 날이면 무작정 달리던 길, 이 길은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신라 진흥왕 18년(서기 557년) 신승이 창건한 운문사는 대작갑사(大鵲岬寺)라 불리다 고려 태조가 ‘운문선사(雲門禪寺)’라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로 불려졌다. 지금은 승가대학과 대학원, 율원과 선원을 갖춘 전국 최대 규모의 비구니 교육 도량으로 알려졌지만 관광지화 된 여느 사찰과는 다르다. 호거산 아래 스스로를 가둔 듯 세상으로 열려 있는, 활짝 핀 연꽃 같은 사찰이다.

미혹으로 결박당한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는 비로자나불, 그 아래 무릎을 꿇고 백팔 배를 하노라면 이내 지혜의 눈이 떠질 것만 같다. 색 바랜 단청과 오래된 마룻바닥이 주는 편안하고 정갈한 기운들, 비로전을 지키는 동서삼층석탑과 담장 너머 불이문의 세계를 상상하는 일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까치 떼가 땅을 쪼는 곳에 절을 지었다는 운문사의 전신인 대작갑사를 떠올리게 하는 작압전(鵲鴨殿) 앞을 지나노라면 작은 공간 속에 나를 맡기고 싶어진다. 두어 시간 정도는 온전히 나를 버릴 수 있기를 희망하며. 가부좌를 하고 앉았노라면 백팔배를 할 때와는 다른 기분에 젖어드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500년 수령의 처진 소나무나 젊은 후박나무의 늠름함 앞에서 일상을 돌아보고, 불이문 앞을 지나다 젊은 스님이라도 만나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면 만다라의 세계가 그리 어렵고 멀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아름드리 전나무 길과 노송들이 늘어선 솔바람 길을 걸어 나올 때쯤이면 내 안에서도 맑은 샘물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만남보다 이별을 경험하는 일이 훨씬 많아졌다. 투병하는 그를 데리고 이곳에 오겠다던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세상에 덩그러니 남아 있을, 주인 잃은 약속들이 모두 하늘에 올라 별이 되어 빛나기를 빌어본다. 건강했던 그가 어느 틈에 내 곁에서 걷는다.

생전에 그도 이 길을 걸었을까. 나처럼 홀로 핀 쑥부쟁이와 사진을 찍고, 미간을 찌푸리며 전나무 꼭대기에 걸린 하늘을 올려다보았을지 모른다. 부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여 몇 번이나 뒤 돌아보기도 했을 것이다. 한 줄의 편지글조차 닿을 수 없는 아득한 허공, 때로는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지척에 그가 있을 것만 같다.

백팔배는 그를 위한 기도로 시작되었다. 땀이 흐르고 몸이 젖는다. 이따금씩 무릎 관절이 경고를 보내오지만 멈출 수가 없다. 내가 없어지고 젖은 몸이 바다가 된다면 후련해질까. 그는 자주 썰물이 되어 내 가슴에서 파도친다. 잘 지내느냐는 흔하디흔한 한 마디를 어디에다 전하랴.

버거울 정도의 아픔이나 고난조차도 누군가에게는 사치로 보여질 수 있다. 힘내라는 말만 되풀이하다 돌아오는 날이면 나의 헐벗은 문장들이 마른 나뭇잎마냥 밤새 떨다 잠들곤 했다. 오히려 상대편의 빠진 머리칼과 창백한 얼굴, 말을 아끼는 눈빛 속에 훨씬 깊고 쓸쓸한 문장들이 설산처럼 쌓이곤 했다. 그가 떠나자 마지막 경전의 문구처럼 내 안에서 종소리가 되어 울린다.

인연이 깊든 얕든 누군가를 떠나보내는 일은 힘들다. 이별 뒤에는 고통과 아픔만 따르는 것은 아닌데 여전히 두렵다. 있을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들이 떠난 후에야 주변을 밝히는 경우가 있다. 나는 한 동안 그를 떠올릴 것이다. 시시할 정도로 작은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그리워할 게 분명하다.

조낭희수필가
조낭희수필가

법당을 나서는데 바람이 어깨를 치며 장난을 건다. 재빠르게 전나무 숲으로 숨어버린 바람의 뒷모습에서 얼핏 그를 보았다. 그는 생각보다 자주, 어쩌면 모든 순간에 함께 하는지 모른다. 멧비둘기의 구슬픈 울음소리나 길고 긴 여름 말없이 타오르던 배롱꽃, 때로는 시집(詩集) 속에 내리는 밤비가 되어 함께 할 수도 있다.

아름다운 삶은 기도로 성장하며 고귀한 죽음을 전제로 한다. 떠오르는 태양처럼 그와 연결된 많은 추억들이 어딘가에서 사랑스럽게 빛나고 있으리라. 세상은 소중한 것들로 넘쳐나고, 수많은 감사의 기도로 충만해진다.

바위틈 이른 쑥부쟁이 한 송이 피어 가을을 알린다. 가만히 두 손 모을 수 있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진실로 소중한 것은 지금, 여기 내 곁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