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민 교육컨설팅 에듀아이엠대표 (커뮤니케이션 전문강사)

“산이 좋아? 바다가 좋아?” 어릴 때 누구나 한번쯤 들어본 질문이다. 예전에는 둘 다 좋다며 대답을 머뭇거렸다. 하지만 이제는 바다가 좋다고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다. 포항에 살면서 좋은 점을 물어보면 나는 주저 없이 ‘바다를 마음껏 볼 수 있는 것’이라 대답한다.

주변에도 바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유를 물어보면 각양각색 대답을 들을 수 있다. 어린아이와 청춘은 여름 바다에 가서 신나게 놀 수 있어서 좋다고 한다. 답답한 일이 있는 사람은 멀리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면 마음이 활짝 열린다고 하고 누군가는 깊은 파도 소리가 마음을 달래주어 좋다고 한다. 이유는 다르지만 바다가 우리에게 다채로운 방식으로 기쁨과 위로를 주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유난히 바다를 좋아해서 상황이나 기분에 따라 찾아가는 바다를 정해두고 있기도 하다. 에너지가 필요할 때는 ‘영일대’ 바다를 찾는다. 포항 인근 해수욕장 중 늘 붐비는 곳이다. 우리나라 해수욕장 중 도로와 상가들이 해변과 가깝게 있는 곳으로 손꼽힐 것이다. 영일대 바다는 계절과 관계없이 사람들이 모이고 구경거리가 많다. 해안 보도블록을 따라 걷노라면 다양한 전시 작품을 볼 수 있다. 특히 포항을 상징하는 스틸 아트 작품이 눈길을 끈다. 버스킹 공연장에서 들리는 통기타 소리가 어깨를 들썩이게 한다. 상점 앞 테이블에 삼삼오오 앉아 이야기 나누는 사람들 웃음소리가 시끌벅적하다. 이때 바다는 조연일 뿐 주연은 사람이다. 그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며 나는 마침내 축 늘어진 어깨를 펼 수 있다.

슬프거나 외로울 때는 ‘흥해읍 방석리’ 바다를 찾는다. 좁은 시멘트 포장길을 걸으면 방파제에 가렸던 탁 트인 바다가 나타난다. 길가 나지막이 핀 들꽃이 바닷바람에 맞춰 춤을 춘다. 그곁 삐죽 고개를 내민 달맞이꽃과 솜털을 뒤집어쓴 강아지풀이 정겹다.

그 길 끝에는 파도를 온몸으로 껴안고 있는 시커먼 바위 군락이 있다. 옷깃을 여미며 바위에 서면 바다가 나를 둘러싼다. 바위가 바다 쪽으로 성큼 나와 있기 때문이다. 들려오는 파도 소리는 장엄하다. 바위 위에 서서 하염없이 몰려오는 파도와 마주하면 박목월 시 ‘크고 부드러운 손’이 떠오른다.

“크고도 부드러운 손이 /내게로 뻗쳐온다. / 다섯 손가락을 / 활짝 펴고 / 그득한 바다가 / 내게로 밀려온다.”

운명의 거센 파도를 온몸으로 견뎌낸 시인의 고백을 조용히 나도 읊조리며 사색에 잠긴다. 시인도 내가 보고 있는 이 바다를 보고 있었을 것만 같다. 온몸을 휘감는 소리에 눈물을 얹으면, 거센 파도에 내 슬픔은 소리없이 녹아내린다. 하얀 포말과 함께 무겁고 우울했던 감정은 넓고 깊은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한없이 넉넉한 바다는 이렇게 모든 것을 품어준다.

복잡하게 얽힌 무언가를 정리하거나 집중해서 생각할 일이 있을 때는 ‘오도리’ 바다를 찾는다. 해변입구에 동화 속 마을처럼 아기자기한 카페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곳에서 마시는 커피 한 잔도 좋지만 두 손에 담길 듯 작은 모래사장에 더 마음이 끌린다. 끝까지 걸어도 십 분이면 충분한 해변은 부담스럽지 않고 아담해서 좋다. 고운 모래는 몇 번을 잡아도 금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고, 물은 깨끗해서 절로 손을 담그게 한다. 모래사장에 털썩 주저앉아 바다 앞 작은 바위섬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다.

툭툭 모래를 털고 커피 한잔 테이크아웃해 주차장 턱에 앉는다. 온통 파란 하늘과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모든 것이 맑아진다. 그 순간 닫혀있던 감각이 열리며 다양한 하늘 풍경만큼 새로운 아이디어가 몽글몽글 피어난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필요한 것은 온전한 쉼이다. 그렇다고 일상의 바쁜 일들을 제쳐 놓고 마냥 쉴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럴 때 가까운 바다를 찾아가는 것은 어떨까? 잊고 있었던 나를 만나고,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듣고 싶었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가을에는 바다와 친해지는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오늘 저녁에는 ‘영일대’ 바다로 발걸음을 옮겨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