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이병철의 경북 바닷길 537km, 그 맛과 멋
⑫ 경북 바닷길의 아름다운 카페들

영덕 병곡 백석해변의 카페 ‘블라블라(Bla bla)’.
영덕 병곡 백석해변의 카페 ‘블라블라(Bla bla)’.

경북의 푸른 바닷길에는 낭만과 사랑, 멋과 맛이 파도친다. 봄에는 벚꽃이 봄비처럼 내리는 해안도로를 따라 도다리들이 올라오고, 여름엔 아까시 향기를 희붐한 불빛으로 뭉쳐 던지는 등대 아래 농어들이 헤엄친다. 가을엔 단풍이 밤물결마저 오색으로 물들인 근해에 볼락과 꼴뚜기들이 뛰어놀고, 겨울엔 흰 눈이 스웨터를 짜 입힌 항구마다 대게 찌는 김이 훗훗하게 피어오른다.
 

바다 풍경 전시하는 화랑
시간이 느리게 가는 행성
보들레르가 영감 포획하고
이상이 문인들과 토론하는

그 카페에 앉아 더 푸른 낭만을
가슴 트이는 해방감을 느낀다

울진 죽변의 ‘르 카페 말리(Le Cafe Marli)’.
울진 죽변의 ‘르 카페 말리(Le Cafe Marli)’.

바다를 찾는 사람들은 북적거리는 포구에서 싱싱한 해산물을 맛보고 싶어 한다. 고운 모래가 펼쳐진 해수욕장에서 일광욕과 물놀이를 즐기고 싶어 한다. 해송 군락지를 걸으며 신선한 피톤치드를 들이마시고 싶어 한다. 밤바다에 너울지는 오징어잡이 배의 불빛을 보며 낭만적 분위기에 젖고 싶어 한다. 포구의 해산물 식당과 해수욕장 사이에, 해수욕장과 해송 군락지 사이에, 해송 군락지와 밤바다 사이에 ‘카페’가 있다. 카페에 가기 위해 바다를 찾는 사람은 많지 않다. 카페는 시간과 시간 사이, 장소와 장소 사이에 잠깐 들르는 곳, 그래서 특별한 공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카페는, 정확히 말해 바닷가의 카페는 아름답고, 아름다워서 무용하며, 무용하기에 가치 있는 곳이다. 카페는 바다의 풍경을 통유리창에 담아 전시하는 화랑이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다른 행성이다. 사랑의 언어들이 달콤한 노래로 흐르는 음악 감상실이다. 커피 향기와 빵 굽는 냄새가 함부로 엎질러진 부엌이다. 바다는 늘 푸르기만 한 것 같아도 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다. 그런 바다의 얼굴에 다채로운 표정을 입히는 것이 해안가의 카페들이다. 카페는 바다의 낭만을 더욱 부풀린다. 카페에서 우리는 휴식하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상상한다. 바닷가 카페에서는 누구나 예술가가 되고, 철학가가 된다.

예술가들은 카페를 사랑한다. 그들은 카페가 일상적인 장소이자 특별한 공간임을 알고 있다. 보들레르는 “우연하고 일시적인 것에서부터 영원한 무엇을 발견하는 일이 예술”이라고 말했다. 예술가들은 카페라는 일상의 공간에 하루 종일 무심하게 앉아 있다가 문득 번갯불처럼 내리꽂히는 예술적 영감을 포획한다. 보들레르는 파리의 카페 ‘누벨 아테네’를 즐겨 찾았는데, 이곳에는 보들레르 말고도 랭보, 에드가 앨런 포, 고흐, 고갱, 마네, 르누아르, 피카소 등이 동시대에, 또 시절을 달리하여 드나들었다. 이들 시인과 소설가, 화가들은 ‘누벨 아테네’에서 ‘초록요정’이라 불리는 술 ‘압생트’를 마셨다.

헤밍웨이가 쿠바 아바나에 머물 때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낸 곳 역시 카페다. 헤밍웨이는 아바나 거리의 ‘라 보데기타’라는 카페에 가 모히또를 마시며 하루를 시작했다. 우리나라 예술가들도 카페를 사랑하기는 마찬가지, 시인 이상은 1933년 종로에 ‘제비다방’이라는 카페를 열었다. 이곳에서 그는 김유정, 박태원, 박팔양 등 동료 문인들과 커피를 마시며 토론했다. 황량한 사막 한가운데 초라한 ‘바그다드 카페’와 ‘호텔 캘리포니아’ 등 영화와 음악에서도 카페는 낭만적인 소재로 등장한다.

 

포항 흥해읍 칠포리의 ‘두 낫 디스터브(Do not disturb)’.
포항 흥해읍 칠포리의 ‘두 낫 디스터브(Do not disturb)’.

울진 죽변항에서 봉평해수욕장으로 가는 해안도로변엔 ‘르 카페 말리(Le Cafe Marli)’가 있다. ‘marli’는 프랑스어로 가장자리라는 뜻, ‘죽변’이 대숲의 외곽임을 떠올려보면 ‘가장자리 카페’라는 이 집 이름은 이국 언어로 지역의 특색을 잘 담아낸 셈이다. 이곳은 파리나 리옹 같은 대도시의 카페가 아니라 마르세유나 니스 등 프랑스 남부의 한산하고 따분한 해안가 카페를 연상시킨다. 봉평해변의 고운 백사장을 바라보며 음료를 마실 수 있는 야외 테이블에는 노랗고 빨간 파라솔이 펼쳐져 있는데, 꽤나 이국적인 그림이다. 테라스와 루프탑에서도 바닷바람과 햇살과 파도소리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카페 내부에는 액자 그림이 몇 점 걸려 있지만, 가장 크고 아름다운 액자는 역시 통유리창이다. 통유리창은 죽변항 방파제의 하얀 등대와 빨간 등대, 방파제에 부딪치는 파도의 흰 포말, 아득하게 파랗기만 한 수평선까지 모두 담아낸다. 이 집은 커피 맛도 좋지만, 커피와 우유, 크림, 얼음을 섞어 만든 ‘프라푸치노’가 인기 메뉴다. 미숫가루 라떼는 중장년들이 좋아한다.

영덕에서 유명한 바닷가 카페는 강구항 근처의 ‘카페 봄’인데, 지난 글에서 자세히 소개했으니 이번엔 다른 곳을 찾아가보자. 병곡면 고래불에서 후포로 가는 길에 백석해변을 지나게 된다. 이곳 백석해변엔 ‘블라블라(Bla bla)’라는 카페가 있다. ‘블라블라’ 역시 프랑스어, 공허한 미사여구나 장광설을 의미한다. 헛소리, 아무 말, 두서없는 수다가 모두 ‘블라블라’다. 직장이나 학교, 사회생활에서 우리는 늘 목적과 의도와 논리가 분명한 언어로 말해야 하지만, 여행지에서는 어떤 의미도, 목적도, 논리도 필요 없다. 그냥 생각나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 말하면 그만이다. 펜션 건물 1층에 딸린 카페인데, 이곳에서는 커피 등 음료는 물론 식사와 술을 함께 즐길 수 있다. 특히 수제등심돈까스가 맛있다. 돈까스를 먹고서 아이스커피를 들고 야외 테라스 소나무 그늘 아래 앉아 병곡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호화스런 휴식이다. 테라스는 흰돌 해변으로 곧장 이어져 있어 파도가 돌을 간질이는 소리 들으며 산책도 즐길 수 있다.

포항에는 근사한 카페들이 많다. 그중에서도 흥해읍 칠포리의 ‘두 낫 디스터브(Do not disturb)’를 첫손에 꼽고 싶다. ‘방해금지’라는 이름부터 맘에 든다. 여행의 가장 큰 적은 외로움도 소매치기도 저질 체력도 아닌 ‘현실’이다. 돌아가야 할 일상, 두고 온 ‘그물’이 끊임없이 손짓하면 여행은 이미 망친 것이다. 예수를 쫓아 위대한 여행길에 올랐던 베드로도 결국엔 갈릴리 해변으로 돌아갔지 않은가. 이곳에서는 어떠한 방해도 받지 않고 온전한 휴식을 즐길 수 있다. 두고 온 일상이 전혀 떠오르지 않을 만큼, 그저 순간에 머물게 해주는 풍경과 여유, 커피가 있기 때문이다. 카페 앞 산책로와 ‘포토존’에는 그리스 산토리니나 수니온을 연상시키는 하얀색 벽돌 조형물들이 놓여 있는데 아침 바다의 푸르름, 저녁 바다의 석양과 어우러지며 환상적인 풍경을 만들어낸다. 이국적 풍경은 눈에 쾌감을 선사하고, 카페 내부에 가득히 퍼지는 빵 냄새는 후각적 쾌감을 고취시킨다. 직접 구워낸 빵을 파는데 그 종류가 무척 다양하다. 말차라떼와 연유브레드가 특히 잘 어울린다. 갓 구워 따뜻한 빵을 한 입 베어 물어 빵의 고소함과 연유 크림의 달콤함이 입안에 진동할 때, 시원하고 산뜻한 말차라떼 한 모금을 마시면 마침내 미각적 쾌감까지 완성된다.

 

경주 양남 해변의 카페 ‘이곳, 그곳’.
경주 양남 해변의 카페 ‘이곳, 그곳’.

경주의 ‘핫’한 카페들은 죄다 ‘황리단길’에 모여 있다. 그러나 가장 근사한 낭만은 경주의 맨 끝 바다, 양남 해변의 카페 ‘이곳, 그곳’에 있다. 1층에서는 넓은 유리창 너머 바다를 바라보며 차를 마실 수 있고, 2층에서는 한옥 서까래의 고풍스러움 아래,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작은 창문에 담긴 바다와 은은한 조명 불빛과 감미로운 음악이 함께 빚어내는 ‘분위기’를 만끽할 수 있다. ‘이곳, 그곳’의 인테리어는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이곳에 앉아 호퍼의 그림 속 인물들처럼 고독을 즐기며, 때로는 그곳의 안부를 궁금해 하면 그곳에서도 누군가가 이곳의 나를 그리워할 것만 같다. ‘비엔나커피’로 잘못 알려진 아인슈패너와 티라미수 케이크가 ‘이곳, 그곳’의 대표 메뉴다. 메뉴판에는 “바빠서 여유가 없을 때야말로 당신이 쉬어야 할 최적의 시간”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나는 포르투갈 남부 라고스 해변의 카페에서 칵테일을 마시며 석양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리스 산토리니의 한 ‘타베르나’(그리스 전통 카페)에 앉아 대낮부터 증류주인 ‘라키’를 마신 적이 있다. 그때 카페에서 바라본 지중해는 이 세상에 없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경북 바닷길 537km를 여행하면서 지중해보다 더 아름다운 카페들과 만났다. 더 푸른 낭만을, 더 시원하게 가슴 트이는 해방감을 만끽했다. 여행이 가장 여행다워지는 순간은, 종아리가 붓도록 이리저리 돌아다닐 때가 아니라 여유롭게, 조금은 게으르게 쉴 때라는 사실을 나는 경북 바닷길의 카페에서 새삼 깨달았다.       /시인 이병철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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