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영재포항예총 회장
류영재 포항예총 회장

우편물 중 ‘○○경찰서’라 적힌 것이 보여 얼른 집어들었다. 경찰서 민원실로 와서 귀하의 교통법규 위반사항을 확인하라는 통보였다. 바로 갔더니, 내 차가 방향지시등을 켜지 않고 차선을 바꾸는 영상을 보여주며 안전운전 의무 위반이니 차후부터는 범칙금을 부과할 것이라며 조심하라 하였다. 전혀 기억에 없는 일을 화면으로 확인하니 세상이 두렵기도 하였고, 운전습관을 스스로도 믿을 수가 없어 창구에 비치된 안전운전 서약서를 써서 제출하였다. 서약을 하고나면 교통규칙을 더 잘 지키게 될 것 같은 생각에서였다.

인간이 지켜야 할 가치 중 약속은 대단히 중요한 덕목이다. 지키자고 하는 것이 약속이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 끝끝내 지켜냄으로써 진한 감동을 주거나 그렇지 못하여 비극적인 종말이 될지라도 약속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에 좋은 소재이다. 필자가 청소년이던 시절, 혼성 듀엣가수의 노래‘약속’이 크게 애창되었는데, 오늘날의 가요처럼 가사가 절절하거나 요란하지도 않고 ‘약속~ 약속~ 그 언젠가 만나자던 너와 나의 약속’이 가사의 대부분이었다. 이 단순한 가사와 느릿한 멜로디가 당대 청춘들의 가슴을 적셨으니 아마도 약속이라는 그 깊디깊은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어린아이 때부터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수없이 많은 약속을 하고 이를 지키려 무진 애를 쓴다. 청춘남녀끼리 새끼손가락을 걸며 하는 약속, 부모와 자식 간의 약속이나 국가 간의 약속 등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약속은 없다. 사회 안전도 교통법규 등 사회적 약속의 이행으로 유지되며 약속을 위반함으로써 발생되는 위험은 매우 크다. 국제적인 약속의 위반은 커다란 분규를 불러 때로는 참혹한 전쟁의 비극을 맞기도 한다. 중요하지 않은 약속이 없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스스로와의 약속이 아닐까 싶다. 스스로의 양심과 내면 깊은 곳에서 약속을 지켰다고 자부할 수 있을 때는 어떤 실패에도 의연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만 그렇지 못했을 때는 더러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오늘이 어머님 기일이다. 어머님은 생전에 “나 죽거든 제사는 너희 아버지 기일에 함께 지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다. 저승에서도 삼종지도를 따르겠다는 당신다운 생각일 수도 있으나 아마도 하나 아들의 짐을 덜어주려던 마음이 더 컸던 것으로 짐작된다. 어머님 떠나시고 몇 해 동안은 제사를 따로 지내다가 다섯 해가 지나고는 시속을 핑계로 아버님 제삿날에 함께 모시기로 하였다. 뭐가 옳은지는 모르겠으나 세월은 뭔가를 자꾸 변하게 만든다. 아마도 변하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가짐이리라. 어머님 생전부터 약속된 것이기는 하나 어쩐지 세월따라 슬쩍 달라진 마음을 들키기라도 할까봐 영 편치가 않다.

요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세가 어수선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의 로켓 발사에 대해 ‘나와 어떤 약속도 위반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애써 자존심을 지키려 하고, 아베 총리는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억지로 그들의 조치가 타당함을 주장하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더 이상 대국으로서의 존엄은 찾아볼 수 없다. 필요에 따라 궁색한 떼를 쓰더라도 스스로에게 부끄럽지는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