⑪ 경주에서 얻은 마음의 평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불국사의 아름다운 회랑.

지난밤은 그야말로 황홀한 축제였다. 동궁과 월지의 야경이 꿈결까지 금빛으로 물들인 덕분에 단잠을 잤다. 꿈속에서 나는 신라 왕자가 되어 산해진미와 가무를 즐겼다. 잠에서 깨니 머리엔 까치집이 얹어져 있고, 늘어난 셔츠 사이로 선풍기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꿈에서 얼마나 신나게 놀았는지 허기가 졌다. 아침 메뉴를 고민하며 고요한 황리단길을 걸었다. 밤늦도록 젊은 여행자들이 맥주잔을 부딪치던 한옥 카페들은 하얀 햇살을 이불로 덮은 채 늦잠에 빠져 있었다. 황오동에 이르렀을 때, 고소하고 달콤한 냄새가 코를 잡아당겼다. 경주 특산품인 황남빵이 노릇노릇 익어가는 냄새였다. 흰 우유와 함께 먹으면 얼마나 맛있을까? 아침 메뉴가 결정됐다.
 

따끈하게 구워낸 황남빵 입에 넣으니
뱃속에 구슬 굴러다니듯 간지러운 웃음이

황홀하고 신비로운 석굴암 앞에서
사람들은 눈물 흘리고 허리 숙여 절한다

어머니 드릴 빵 사서 서울로 가는 길
노릇노릇 잘 익은 석양 내 등을 쓰다듬네

황남빵은 81년 전인 1938년 최영화 장인이 만들었다. 얇디얇은 빵 속에 팥앙금이 가득 들어 있는데, 안 먹어본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먹어본 사람은 없다고 한다. 경주 사람들이 즐겨 먹는 간식에서 지금은 경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꼭 사가는 지역 특산품이 됐다. 주말이나 휴가철 성수기엔 황남빵을 직접 맛보거나 지인에게 선물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선다. 주문이 많이 몰릴 때는 계산하고 나서 두세 시간 뒤에야 빵을 받을 수 있다. 갓 구워낸 황남빵을 먹는 것은 꽤나 특별한 행운인 셈이다. 이날은 6월말의 평일, 다행히 원조집인 ‘최영화빵’은 한산했다. 황남빵 10개들이 한 상자를 샀다. 방금 구워내 따뜻한 빵을 손에 쥐었다. 온기가 온몸으로 퍼지며 마음까지 데웠다. 황리단길 벤치에 앉아 황남빵 한 개를 한 입에 욱여넣고, 뜨거운 팥앙금에 입천장이 데이려는 순간 흰 우유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달콤하고 뜨뜻한 것이 목구멍으로 꿀떡꿀떡 넘어가자 뱃속에서 구슬이 이리저리 굴러다니는듯 저절로 간지러운 웃음이 났다.

황남빵으로 배를 채우고 석굴암을 향해 차를 몰았다. 석굴암 주차장에 도착하니 평일인데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와 있었다. 주차장에서 석굴암까지는 걸어서 15분 정도 걸린다. 토함산 울창한 나무 그늘 아래 흙길을 걸으면 햇살과 나무 냄새와 새소리와 바람이 몸속으로 들어와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초여름의 무성한 초록이 피리 소리가 되어 걸음마다 생각마다 경쾌한 춤이 되게 해줬다. 석굴암 가는 길이 더욱 즐거운 것은 다람쥐들의 재롱 덕분이다. 사람을 겁내지 않는 다람쥐들은 우듬지를 타고 내려와 깡충깡충 뛰어다니거나 바위 뒤에서 불쑥 튀어나와 솜뭉치 같은 꼬리를 쫑긋 세우며 사람들을 웃음 짓게 했다. 석굴암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석굴 내부 본존불의 천년 미소를 보기 전에 숲길에서 벌써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경주 특산품인 황남빵. 팥앙금이 가득하다.
경주 특산품인 황남빵. 팥앙금이 가득하다.

세상에 두 번 태어난 김대성은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 불국사를 짓고, 가난한 전생의 부모를 위해선 석불사, 즉 지금의 석굴암을 지었다. 석굴암 본존불 앞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서도 전생의 부모를 섬긴 김대성의 지극한 효심에 한 번 감동하고, 신라인들의 정교한 건축 기술에 두 번 감동했다. 석굴암은 지하수가 솟아나는 암반 위에 있다. 지하수로 인해 석굴 바닥의 온도가 본존불을 모신 상부보다 낮아 이슬이 바닥에만 맺히는 구조로 천년 넘게 유지됐으나 조선 말기에 거의 방치되어 보존 상태가 불량해진 것을 일제가 시멘트를 사용해 주먹구구식으로 복원하면서 내부에 결로와 이끼가 생기고 화강암이 손상되는 등 원형을 많이 상실했다. 이후 몇 차례 복원 공사를 거쳐 지금은 커다란 통유리로 완전 밀폐된 채 습기로부터 차단되어 있다. 1년에 딱 하루, 석가탄신일에는 이 유리벽을 개방해 신도들이 석굴 내부로 들어가 본존불 주변을 돌며 기도할 수 있게 허용된다.

해 뜨는 동녘을 바라보는 석굴암 본존불 석가여래좌상 앞에서 어떤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허리를 숙여 절했다. 유리벽으로 막혀 있어 먼발치에서밖에 볼 수 없지만, 그럼에도 석굴암의 숭고미는 온몸을 압도하는 전율로 다가왔다. 신라 불교미술의 가장 찬란한 걸작이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석굴암을 사진에 담고 싶을 텐데, 사람들은 사진 촬영을 금지하는 관람 규칙을 철저히 지켰다. 이 황홀하고 신비한 아름다움 안에 그저 머무르기만 하면 충분하다는 듯이.

석굴암을 내려와 다시 토함산 숲길을 걸었다. 꼭 부처를 만나지 않더라도, 현실의 공간이 깨달음의 장소로 변모하는 순간이 있다. 평범한 일상에서 어떤 뜻밖의 정경과 마주하게 될 때, 그 마주함을 통해 오래 묵은 생각과 마음을 갈아엎게 될 때 우리는 해탈과 열반의 세계를 체험하게 된다. 무당이나 박수 등 영매(靈媒)에 의해 행해지는 내림굿이나 접신무 같은 무속제의 또는 ‘신 내림’이라고 하는 신비한 영적 현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부처는 어디에나 있으므로, 경전이나 교리가 아니더라도 삼라만상 무엇에서든 깨달음을 얻으면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바로 ‘무설설무법법(無說說無法法)’의 화두다. 나는 본존불 앞에 섰을 때보다 석굴암을 다녀가는 숲길에서, 숲길을 뛰어다니는 다람쥐들의 춤에서, 다람쥐를 보며 웃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오랫동안 애타게 찾아 헤맨 평화를 발견했다. 그리고 마침내 오래 묵은 걱정과 근심을 다 씻어냈다.

석굴암에서 마음의 평화를 얻었더니 불국사 구경은 그저 선물 같았다. 글감을 찾아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도, 무수히 소개된 불국사에서 어떤 새로운 풍경과 의미를 발견해야 한다는 강박에서도 벗어나 넓디넓은 경내를 천천히 걸었다. 대웅전도 다보탑도 삼층석탑도 다 내 마음의 여러 모양이었다. 법당 회랑엔 ‘불국사 글짓기 그리기 대회’에서 입상한 유치원생들의 크레파스 그림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이들의 상상력은 가슴을 뛰게 한다. 그림 속에선 부처도 사람도 새와 나무도 다 환하게 웃고 있었다. 아이들은 그런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관광객들에게 경주 맛집으로 각광 받는 ‘함양집’ 보문점을 찾았다. 보문관광단지와 가까운 동궁원 근처에 있다. 한우물회와 육회비빔밥이 유명한 집이다. 여름에는 특히 살얼음 육수에 한우 생고기와 함께 배, 오이, 무, 소면 등을 담아내는 한우물회가 ‘인기 폭발’이다. 요즘은 젊은 세대 취향과 ‘SNS 감성’을 충족하는 치즈 불고기도 많이 팔린다 한다. 불고기 위에 모짜렐라 치즈를 잔뜩 얹어 마치 피자처럼 접시에 얹어낸다. 평일임에도 점심시간에는 긴 줄이 섰다. 대기명부에 이름을 적고 20여분을 기다려야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주문하자마자 한우물회가 상에 올랐다. 먼저 소면을 말아 새콤달콤하고 시원한 육수와 함께 후루룩 흡입하고, 생고기를 한 숟가락 듬뿍 입안에 넣어 우물거리니 또 한 번 뱃속에서 구슬이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육수에 밥을 말아 먹으니 허기와 더위가 한방에 해결됐다. 한우물회 한 그릇에 1만2천원, 대체로 비싼 편인 경주 물가를 감안하면 괜찮은 가성비다.

경주 맛집 ‘함양집’의 한우물회 한상.
경주 맛집 ‘함양집’의 한우물회 한상.

함양집 바로 앞에 동궁원이 있다. 동궁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동식물원이었던 동궁과 월지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관광지다. 식물원과 버드파크, 음악분수 등의 시설을 갖춰 어린아이들의 체험학습 공간으로, 연인과 가족의 휴식과 산책 공간으로 사랑받고 있다. 버드파크 입장권을 끊었다. 공작, 타조, 앵무새 등 새들은 물론 물고기와 강아지, 거북이, 기니피그 등 다양한 동물들도 볼 수 있다. 새들의 화려한 오색 날갯짓은 눈을 즐겁게 했고, 온갖 아름다운 소리로 울어대는 노래는 귀를 황홀하게 했다. 대개 동물원의 조류 전시관에선 새들의 배변 냄새가 지독한데, 이곳 버드파크에서는 악취가 전혀 나지 않아 관람하기에 몹시 쾌적했다. 입구에서 파는 새 모이를 사서 손에 올려두고 있으니 앵무새들이 날아와 손 위에 앉았다. 동물과 스킨십하는 색다른 체험까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새를 무서워하는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어느 로맨틱한 청년은 손바닥에 내려앉은 새에게 연인을 향한 고백의 언어 ‘사랑해’를 따라 하게 했다. 그 장면에 괜히 외로워져 버드파크를 빠져나왔다.

내 외로움을 달래준 것은 한국대중음악박물관이다. 동궁원과 마찬가지로 보문관광단지 근처에 있다. 이곳에서는 한국대중음악 100대 명반을 비롯한 수많은 LP앨범과 뮤지션들의 애장품, 악기, 1920년대에 사용된 희귀 음향 시스템 등이 전시되고 있으며, 시청각실에서는 원하는 음악을 직접 턴테이블에 재생해 감상할 수 있다. 방탄소년단 등 최신 케이팝과 평소 좋아하는 락 음악을 신나게 감상하다가 갑자기 석굴암과 불국사를 지은 김대성이 생각나 바비킴이 부른 ‘MaMa’를 찾아 들었다. “당신이 내게 했던 것처럼 이젠 내가 안아줄게요.” 김대성은 전생과 현생의 부모 모두를 지극히 섬겼는데, 나는 무얼 하고 있나? 박물관에서 나와 ‘최영화빵’ 가게를 찾았다. 엄마 갖다 줄 황남빵 30개들이 한 상자를 사서는 서울로 차를 몰았다. 노릇노릇 잘 익은 석양이 내 등을 따듯하게 쓰다듬어주었다.      /시인 이병철

    시인 이병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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