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길수수필가
강길수 수필가

그놈만 아니었더라면, 오늘같이 무더운 날은 집에서 찬 수박이라도 나누며 티브이 보는 게 제격이다. 한데 사는 게 무엇인지 아내도, 나도 의기투합이라도 한 듯 주섬주섬 도구들을 챙긴다. 지난 주말, 텃밭에서 만난 처참한 광경이 눈앞에 아른거려 현관을 나설 수밖에 없다.

차를 굴다리 밑에 세우고, 필요한 것들을 챙겨 텃밭으로 간다. 많이 궁금했던 고구마 이랑으로 먼저 가 본다. 지난번 왔을 때, 멧돼지가 다 파 해쳐 잎은 마르고 샅샅이 젖혀진 뿌리에는 새알 고구마 하나도 달린 게 없었다. 사람이 팠던 땅을 어찌 아는지, 고구마 줄기나 파뿌리를 심었던 자리는 모두 패여 있었다. 울며 겨자 먹기로 다시 심어 물까지 주었었다. 새로 심은 고구마를 또 옹골지게 모두 파 뒤집었다. 비록 늦을지라도, 줄기와 잎은 따 먹을 수 있을 거란 희망으로 심었던 고구마다.

너무 무참히 유린당한 모습이, 보기 싫었던 아래쪽 옥수수 이랑으로 발길을 돌린다. 혹시 작은 옥수수 한통이라도 화를 면했나 싶어, 자세히 살펴봐도 깡그리 아무것도 없다. 옥수수 알 뿐 아니라, 이삭도 통째 몽땅 먹어 치웠다. 대는 다 부러지고, 찢어지고, 넘어지고, 뽑히고, 짓이겨져 폭삭 내려앉았다.

먹이사슬의 잔인함이 여지없이 드러난 텃밭의 모습이 내 초심을 흔들었다. 재작년과 작년에는 고라니만 출몰했었다. 고라니는 어린 옥수수를 뜯어먹는 데 그쳤었다. 그때만 해도 ‘그래. 우리가 농사 전업도 아니고, 시간 소일거리로 작게 시작한 텃밭 가꾸기이니 노지재배를 고수하자. 삭막하고 각박하게 울타리 치지 말고, 자연에 맡기자. 명색이 환경 분야에 오래 일했지 않은가. 생태계 먹거리는 모든 생명이 나누어 먹으라고 주어지는 것이니까’라고 마음먹었다. 이런 뜻에 아내도 암묵적 동의를 했었다.

가끔 고향에 가면 동생은 야생동물 특히, 멧돼지의 횡포로 농사짓기가 정말 어렵다고 토로한다. 고구마 같은 작물은 한해 농사를 폐농(廢農)하는 농가도 많단다. 피해 현장을 목격하지 못한 나는, 그 걱정을 피상적으로 듣곤 했다. 하여, 농민들이 자구책으로 공기총이나 올가미, 덫을 써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못하였다. 반면, 작은 우리 텃밭의 수난현장을 겪는 마음이 착잡하고 헷갈린다. 사람의 입장과 멧돼지의 상반된 입장이 가슴속에서 충돌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논밭에 울타리나 망을 치거나 과도한 농약을 쓰는 등, 자기들만 먹으려 섭리에 도전하고 있다. 때문에 동물들도 살기 위해, 인간에게 응전(應戰)이라도 하여 예전보다 더 깡그리 농작물을 해하는 걸까. 나무만 무성하여, 산야의 먹이 환경이 예전만 못해 야생 먹이가 부족해졌단 말인가. 아니면, 멧돼지를 포함한 야생동물들의 개체 수가 늘어났기 때문일까.

야생 짐승들로 부터 농작물 피해를 보는 농민들은, 동물 보호론자나 환경운동 단체들의 행태나 당국의 탁상행정에 분개한다. 현장을 너무 모른다는 것이다. 농촌 출신으로 도회에 살며 환경 분야에서 오래 일한 나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지 않아도 기후변화로 지구촌 모든 생명의 지속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인간과 다른 생명과의 먹을거리 쟁탈 갈등은 어떻게 수습해야 할 것인가. 딜레마다.

웰빙 붐과 로하스 운동, 슬로시티 운동 같은 움직임들이 구미(歐美)를 중심으로 있지만, 아직 지구환경 전체의 개선을 이끌어 나가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인다. 인간은 역지사지(易地思之) 정신이 있기나 한 것일까. 그린란드의 빙하가 삼십 년 만에 거의 다 녹았다는 미국 나사(NASA)의 발표를 뉴스에서 보았다. 북극얼음이 곧 다 녹아, 선박의 북극항로도 열릴 것이란 보도도 있다. 열린 북극항로가 인간과 지구촌에 축복이 될지, 재앙으로 닥칠 것인지는 가히 짐작이 가는 문제다.

인간과 함께 살아가야 할 생태계의 많은 생명이 하나, 둘 멸종의 길로 가고 있음도 이미 밝혀진 바다. 멧돼지와 야생생물들은 이 미증유의 사태를 본능으로 느끼고, 우리 인간에게 도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태계에 점철된 먹이 갈등 딜레마를 풀어낼, 솔로몬의 지혜는 정녕 없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