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김병래 수필가·시조시인

여름이 가고 있다. 이 들녘에 주둔해 있던 염제(炎帝)의 군사들이 조금씩 철수하고 있다. 뜨거운 폭양과 이따금 내리는 비를 맞으며 무럭무럭 차오르던 초록의 벼들로 지난 여름의 들판은 참 무성했다. 일사불란하고 질서정연한 초록제복의 역군들이 생명의 양식을 생산하는 일에 일로매진해왔다. 들판은 굴뚝이 없는 거대한 공장이었다.

기계화된 공장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이 광합성 공장에도 이젠 사람이 거의 없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라던 벼들이 이제는 가끔씩 물꼬를 보러 오는 오토바이 소리나 지하수를 퍼 올리는 양수기소리를 들으며 자란다. 겉보기엔 옛날의 들과 크게 다를 게 없는 것 같지만 그 내막을 들여다보면 천양지차다. 한 줌의 쌀이 되기까지 여든여덟 번이나 손이 간다는 말은 이제 전설이 되어버렸다. 못자리부터 추수까지 사람 손이 직접 닿는 일이 거의 없어진 게 요즘 농사다.

벼가 팬다. 만삭의 배를 안고 있던 벼들이 일제히 이삭을 밀어 올린다. 벼들에게도 해산의 고통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처서 무렵의 들판은 온통 신생의 파동으로 술렁거린다. 아마도 지난 시절의 농부들은 이맘때쯤이면 자식이라도 보는 양 설레고 흐뭇한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런 감격조차 이제는 추억으로나 남아있을 뿐이다. 편리와 능률이라는 명분으로 우리 삶에서 생략되어진 수많은 과정들, 그 과정들에 배어 있던 삶의 애환들이 한갓 멍에와 노역에 불과한 것이었을까.

들판의 초록물결 위로 제비들이 난다. 일부러 찾아도 잘 보이지 않던 제비들이 갑자기 수가 늘어난 걸 보니 그새 새끼를 친 모양이다. 먼 길 떠날 채비로 부지런히 비행연습을 하는 것이리라. 아직도 이 땅에 제비가 찾아와 준다는 것이 고맙고 반갑다. 행운의 박씨를 물어다 주어서가 아니라, 오랜 세월을 한 지붕 아래 산 정리(情理)가 그렇다. 가축이나 애완동물이 아닌 철새들과 수천 년을 한 지붕 아래 살아온 인연이 어찌 가벼울 것인가. 기와든 초가든 제비집이 없는 집이 없던 시절이 있었다. 여름내 서너 마리씩 새끼를 키우느라 분주하게 벌레를 잡아 들락거리던 제비 부모들, 노란 부리를 한껏 크게 벌리고 서로 달라고 졸라대던 새끼들, 그 광경은 같은 지붕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과 다를 게 없었다. 제비야 반갑다. 그리고 미안하다. 제비들이 둥지를 틀 수 없도록 가옥의 구조를 바꾸고 들판에 농약의 살포해 먹이를 없애버린 인간들의 행위가 터무니없는 조건으로 세 들어 살던 사람을 내쫓은 고약한 집주인과 다를 게 없을 터이다.

바람이 분다. 여름 내내 바람을 쐬러 이 들녘으로 나왔다. 들판 한가운데서는 어디선가 늘 바람이 불었다. 미풍에서 태풍에 이르기까지 바람은 참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졌다.‘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고 읊은 시인도 있지만, 피부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에는 참으로 무수한 느낌이 들어 있다. 그 모든 느낌을 관통하는 것은 생명감이다. 열풍이든 산들바람이든 바람은 끊임없이 살아있음을 환기시킨다.

우리는 살아있음을 자각하지 못한 채 대부분의 시간을 살고 있다. 항상 바쁘고 무엇에 기 듯이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잊고 살기가 일쑤인 느낌이다. 잠시라도 그런 분주와 황망에서 벗어나려고 좌선이나 명상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고 하지만, 웃통을 벗고 들판 한가운데서 발람을 쇠는 것보다 나은지 모르겠다. 사람이 불철주야 의지를 불태우고 노력을 해서 얻은 성취감이나 자존감이 맨살에 와 닿는 바람의 감촉이 주는 생명감보다 더 충일한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여름이 조금씩 비운 자리에 가을이 스며들고 있다. 들판 가득 가을의 예감이 술렁거린다. 이 들판에 땅 한 평 가진 것 없고 지은 농사도 없지만, 이 가을의 예감 또한 소중하다. 누가 내 삶의 계절에서 또 여름 하나를 빼내간다는 이 느낌이 아쉽기도 해서 계절의 추이(推移)를 온 몸과 마음으로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