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김맹산(金孟山)의 장기 유배

포이포진이 있었던 장기면 모포리 전경. 포이포진은 세종 때 설치되어 왜적을 방비하다가 1658년에 부산 동래로 옮겼다. 이곳에 진이 설치되면서 수영이 있었던 곳을 ‘수영포’(장기면 영암3리)라 불렀고, 큰 초소가 있었던 곳을 ‘대초밭’(大哨田: 장기면 대진리)이라 불러 현재까지도 그 지명이 전한다. 이곳에는 역(役)에 처해진 많은 유배객들이 수군으로 충당된 곳이기도 하다. 보이는 뒷산 뇌성산 봉우리에는 뇌성산 봉수대가 있었다.

환술(幻術)은 재빠른 손놀림이나 여러 가지 장치 등을 이용하여 눈속임으로 불가사의한 광경을 보여주는 연희의 일종이다. 지금은 마술(魔術)이나 요술이란 말을 쓴다.

우리나라는 환술에 관한 문헌기록이 매우 드물다. 삼국시대의 환술에 대한 기록은 입호무(入壺舞)가 유일하다.‘신서고악도’에 실린 입호무에 대한 그림을 보면, 재주꾼이 여유로운 표정으로 작은 항아리에 몸을 구겨 넣어 반대편에 놓인 다른 항아리로 빠져 나오는 모습이다. 마치 오늘날의 마술사들을 연상케 한다. 고려시대에는 불을 토해내는 토화(吐火)와 칼을 삼키는 탄도(呑刀)가 있었다.

조선시대 와서야 비로소 제대로 된 환술이 선을 보였다. 사용되는 여러 가지 기술들이 중국으로부터 도입되었던 것이다. 기묘한 재주를 부려 여러 사람들의 눈과 귀를 즐겁게 했던 환술이 대중들의 인기를 끌자, 이를 나쁜 용도에 사용하는 일당들이 생겨났다. 바로 1473년(성종4) 조선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중(僧) 설징(雪澄) 등 25명의 패거리였다. 이들은 천안(天安)에 살고 있는 승려들이었음에도 모두 관비(官婢)를 처(妻)로 삼고 있었다. 이른바 파계승들이었다. 이 파계승들은 계율을 깨뜨린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속여 재물을 탈취했다. 오늘날로 치면 장터를 돌아다니며 장꾼들을 속여 돈을 편취하는 야바위꾼들이던 것이다.

이들은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지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의 직인까지 찍힌 문서를 위조해 사기를 쳤다. 그 위조한 문서 내용도 그럴듯했다. ‘어떤 현(縣)의 아무개가 착한 일 하기를 좋아한다 하므로, 내가 기쁘게 들었다. 지금 가는 비구니 아무개의 말을 들으니, 금강산 아무개 절(寺)에서 승려가 입는 옷을 만든다 하니, 거기 소용되는 면포(綿布) 몇 필(匹)을 허락해 보낸다면, 너희들의 부역을 영구히 면제시키고 양민(良民)으로 놓아주겠다.’는 것이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도사인 것처럼 요술도 부렸다. 사람의 젖으로 재(灰)를 개어 종이에 글자를 쓰거나 불상(佛像)을 그려서, 그 종이를 물에 담그면 흰색 무늬 불상이 되고, 불에 비치면 붉은색 무늬의 불상이 되었다. 또 사람의 오줌으로 팔뚝과 손등에 부처를 그리고 글씨를 쓴 후에, 소나무 숯가루를 뿌리고 털어내면 마치 문신을 새긴 것처럼 그곳에 검은색 글씨나 무늬가 생겨났다. 글자나 그림을 순식간에 나타나게 하거나 색상을 다양하게 변화시킬 수 있었으니, 백성들이 속을 수밖에 없었다. 이들에게 홀려 재산을 홀딱 날린 사람들이 속속 늘어났다. 부역과 천민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왕실 실권자의 문서도 있거니와, 도술을 쓰는 믿을 만한 승려들이 그 문서를 제시하며 행사를 했으니 속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었겠는가. 지방 수령들이 여기저기서 피해사실을 조정에 보고했다.

당시 명의를 도용당한 대왕대비는 정희왕후(貞熹王后·1418~1483) 윤씨였다. 이 무렵은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갑자기 죽고, 열세 살 어린 나이의 성종이 왕위에 오른 시기였다. 그래서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가 섭정으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게 됐다. 조선 7대왕 세조의 왕비인 정희왕후는 세종부터 성종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그녀는 조선이 개국한 이후 혼란을 수습하고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을 가장 가까이에서 목격을 하였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했다.

 

‘전우치전’. 도술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이 작품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전우치전’. 도술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는 이 작품은 오늘날의 기준에서 보면 허황된 이야기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 영웅의 출현을 기대하는 민중의 염원이 담겨 있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처음 왕자의 아내로 조선 왕실과 인연을 맺은 그녀는 이후 왕비가 되었고, 후대의 왕을 고를 수 있는 권리를 놓쳐버리지 않았으며, 마지막에는 수렴청정을 통해 7년간 국가정책 최고결정권자의 자리에 있기도 하였다. 정희왕후의 65년여 연간의 인생은 격동의 조선 전기 정치사 어느 한 부분에서도 빠진 적이 없었다. 스님이라고 하는 자들이 도술을 쓰며 왕실의 공문서를 위조해 백성들을 기망하고 다녔던 이때도 정희왕후는 그 정점에 있었다. 이 패거리들로 인해 전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조정에서는 의금부에 특명을 내려 이들을 모두 잡아들이라고 했다. 의금부에서는 한 달 동안 수사를 한 끝에 범인 일당 중 일부를 잡아들였다. 잡힌 사람들은 승려 설징과 일본에서 온 승려 신옥(信玉), 권문세가에서 부리는 노비 기금동(奇今同), 농민 출신 군인인 이계산(李繼山), 김맹산(金孟山) 등이었다. 일당 중 승려 설산(雪山)·월심(月心)·계엄(戒嚴)·성명(性明) 등 십 수 명은 이미 낌새를 채고 줄행랑을 쳐버려 잡지를 못했다.

1474년 1월 4일, 임금은 검거된 사람들 중 주모자급을 모두 참형에 처했다. 일당 중 김맹산의 가담 정도는 경미하였다. 그는 바람잡이 격이었다. 그래서 이날 참형은 면하고,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역(役)에 처해진 그는 엄동설한에 동상으로 퉁퉁 부은 발로 860리를 걸어서 왔다. 하루 95리를 걸어야 9일반이 걸리는 머나먼 유배길이었다. 조선시대 역이란 죄수나 새로 노비·기생 따위의 천인(賤人)이 된 사람에게 노역(勞役)이나 신역(身役)을 배정하여 주는 것을 말한다.

김맹산처럼 조선시대 유배형을 받아 역에 처해진 사람들의 집행과정은 어떠하였을까? 유형은 천민부터 양반까지 모두 받는 형이었는데, 신분에 따라 유배 가는 모습도 천차만별이었다. 천민이나 평민은 걸어서 갔다. 이들을 유배지로 호송하는 호송관은 역(驛)이 해당되는 지역의 포졸들이 했다. 역과 역을 릴레이식으로 연결해서 유배지 해당역까지 인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포졸들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유배자를 다음 역까지 이동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 일이 귀찮은지라 빨리 유배자를 다른 역까지 보내고 일을 끝내려는 심보였다.

반면 관직을 가진 관원의 경우는 당하관인 경우 나장(羅將)이 담당했고, 당상관의 경우는 서리(書吏)가 호송을 책임졌다. 고위급 관리의 경우에는 의금부 도사가 호송을 담당했다. 평민들과는 달리 이들의 호송은 말을 타고 여유롭게 갔으니, 양반사회의 신분차별이 여기에서도 나타났다. 유배자들은 이들 호송관의 노자까지 책임져야 했다. 규정상 하루 80∼90리는 가야 했고 보통 수일에서 수십일 걸리는 길이었으므로, 밥값과 숙박비만 해도 만만치가 않았다. 신분이 높아 호송하는 인원이 많아지면 그에 따른 비용도 어마어마했다. 가난한 선비와 평민들은 하인이나 말 한필 없이 홀로 가야만 했다. 곤장을 맞고 성치 않은 몸으로 유배에 나선 이들에게 유배길은 곧 생과 사가 교차되는 죽음의 길이기도 했다.

형벌로 과해지는 역(定役)은 변방의 역리(驛吏)나 관노비, 충군(充軍) 따위였다. 특히 충군은 군역에 복무를 하도록 한 것인데, 정군(正軍)으로서의 군역이 아니고 고된 천역인 수군이나 국경수비대 등에 충당되었기 때문에 보편적이면서도 가장 엄한 형벌의 하나였다.

조선시대 장기현에는 복길·뇌성·발산 3개의 봉수대가 있었고, 읍지(1832년)에 의하면 이에 속한 봉군만 해도 300명 넘게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곳에는 종4품의 만호(萬戶)가 수장으로 있는 포이포진(包伊浦鎭)이 있었다. 포이포진은 조선 세종 때 왜적을 방어하기 위해 오늘날 포항 장기면 모포리에 설치하였는데, 진의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병선 8척 군사 5백89명이 있다’고 했다. 이런 사정으로 장기현에 배정된 유배인들 중에는 봉수대를 지키는 봉군 아니면 포이포진의 수군에 충군되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 김맹산도 위 둘 중 한곳에 충군되었을 것으로 추정은 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성종은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환술에 속지 말 것을 전국에 지시하였다. 그 후로부터 환술은 조선 내내 속임수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범죄로 취급되었다.

하지만, 이런 엄한 금령과 처벌에도 불구하고, 환술과 도술에 능했던 유명한 인물이 또 나타났다. 바로 ‘전우치(田禹治)’란 사람이다. 그는 중종 때 서울에서 벼슬을 하다가 사퇴하고 송도에 은거하면서 도술가(道術家)로 널리 알려진 사람인데, 조선 중기 유명한 문신인 신광한(申光漢), 송인수(宋麟壽) 등과 친하게 지냈다고 전한다. 하루는 신광한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하던 중에 입에 넣은 밥알을 내뿜자 그것이 각각 흰나비로 변하여 날아갔다고 한다.

복길봉수의 현재모습. 장기면 계원1리에 있는 이 봉수대에는 조선시대 충군된 봉수군들이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복길봉수의 현재모습. 장기면 계원1리에 있는 이 봉수대에는 조선시대 충군된 봉수군들이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또 어느 때는 가느다란 새끼 수백 발을 하늘에 던지고 동자(童子)를 시켜 하늘에 올라가 천도(天桃:복숭아)를 따오게 했다고 한다. 나라에서는 이 소문을 듣고 그를 잡아다가 백성을 현혹시켰다는 죄로 신천옥(信川獄)에 가두었는데, 옥에서 그만 죽고 말았다. 뒤에 친척들이 이장(移葬)하려고 무덤을 파보니 시체 없는 빈 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오산집(五山集)’에 의하면, 어느 날 전우치가 차식(車軾)이라는 사람을 찾아가 ‘두공부시집(杜工部詩集)’ 1질(帙)을 빌려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때는 이미 전우치가 죽은 지 한참 후였다는 것이다. 전우치의 혼백이 와서 책을 빌려갔다는 이야기다. 이뿐 아니라 후세에 전하는 각종 문헌에는 그에 관한 신비한 행적이 공통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실존인물 전우치의 행적을 소설화한 작품도 나왔다. 바로 ‘전우치전’이다. 그 줄거리는 탐관오리들을 골탕 먹여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민생고를 해결해주는 것이다. 앞서 성종때 김맹산 패거리들이 환술을 악용했던 것과는 달리 전우치는 부패한 사회와 탐관오리들을 고발하고 응징하여, 새로운 세상을 이루고자 했던 개혁적인 사상을 소유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보면, 환술이 사람들의 눈을 속이는 기술이긴 하지만, 억눌린 민초들에게 즐거움을 제공하는 데는 그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많은 환술에는 과학이 숨어 있었다. 자연과학의 원리에 뛰어난 연기력을 더하면 일반 상식을 초월하는 멋진 환술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특히 화학이나 물리학적 원리를 이용하면 더욱 그랬다.

김맹산 등의 패거리가 백성들을 속이기 위해 사용한 것은 화학의 원리를 응용한 환술이었다. 조선 중기에 들어서면 중국으로부터 서양문물이 조금씩 들어오게 되고, 일부 눈을 뜬 사람들이 화학변화의 원리를 깨닫게 되면서 환술의 기술에도 변화가 왔다. 종이에 글자나 도화를 나타나게 하거나 글자와 그림의 색상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 펄펄 끓는 솥에 손을 넣어도 화상을 입지 않는 것, 불을 입에서 토해내는 환술 등은 사물의 화학적 변화를 이용하는 수법이다.

‘신서고악도’에 보이는 입호무의 묘기. /사진출처  네이버 한국전통연회사
‘신서고악도’에 보이는 입호무의 묘기. /사진출처 네이버 한국전통연회사

앞서 언급한 패거리들이 사용한 수법도 알고 보면 간단하다. 광물인 초석(硝石)을 물에 섞은 후 붓에 그 물을 묻혀 글자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 글자와 그림이 마르면 아무런 흔적이 없지만, 향불에 쬐면 그것들이 다시 나타난다. 색깔이 붉은색으로 바뀌는 것도 종이와 물에 비밀이 있다. 종이는 보통 종이가 아닌 강황지(薑黃紙)를 사용하고, 물은 소다수를 사용한다. 강황이 소다를 만나면 붉은색으로 변하는 화학적 변화를 일당들이 알고 이용한 것이다.

환술을 사기행각에 이용하다 장기현 역(役)에 처해진 김맹산은 1476년 1월 21일까지 약 2년간 이곳에서 생활하다가 갔다. 이후에도 환술 때문에 옥사한 전우치의 예에서도 보듯이, 조선왕조실록 등에는 환술을 쓰다가 참형을 당하거나 유배를 가는 내용이 더러 있다. 그래서 환술은 공연으로 승화되지 못했고, 음지에서 은밀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양반층들은 그래도 문화생활을 누리기에 충분했다. 시를 짓고 회화를 그리고, 때로는 기생들과 가무를 즐기며 회포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성들은 달랐다. 대중문화가 없던 시절, 환술조차도 마음대로 관람하지 못했던 시대를 살다간 민초들의 삶이 왠지 애처롭게 느껴진다. /이상준 향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