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5) 현대가사문학의 선구자 조애영(下)

조애영의 조카 조지훈을 기념하는 지훈문학관.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조애영의 조카 조지훈을 기념하는 지훈문학관.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21세인 1931년 배화여고보를 졸업한 조애영은 시험 없이 이화여전 가사과에 합격했다. 이때 선교사가 조애영의 능력과 영어 실력을 보고, 미국유학을 권했다. 그러나 부모와 오빠의 반대에 부딪혀 유학은 이루지 못했다. 얼마 뒤 이화여전을 중도에 그만두고 집안의 권유로 일본 유학을 다녀온 영천 출신의 이담(李潭)과 혼인했다.

그러나 신여성으로서의 그녀의 결혼 생활은 녹록하지 않았다. 남편은 중앙고보시절 만세운동에 참여할 정도로 사회참여에 적극적인데다 일본유학까지 다녀온 신지식인이었지만 아내의 사회생활은 허락하지 않았다. 신교육까지 받은 그녀로서는 참아내기 어려운 부분도 많았겠지만, 그녀는 원망이나 미움보다는 전통의 덕목을 따랐다. 갈등과 충돌보다는 화의(和議)의 길을 택한 것이다.

비록 적극적인 사회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 신교육으로 습득한 지식을 남편의 사업에 보탰다. 1940년에 이르러서는 배화여고보 학원재단 기성회원이 되기도 했다. 활동을 시작한 초기에는 동창회와 같은 소극적인 활동이었지만, 점차 여성단체로 폭을 넓혀 나갔다.

48세가 되던 1958년에 이르러 조애영은 친구의 권유로 그동안 쓴 작품 들을 모아 시조집 ‘슬픈 동경’을 출간하고자 했다. 그러나 남편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결국 그 가운데 몇 권만이 조카 조지훈에 의해 남겨졌다. ‘슬픈 동경’이라는 제목은 조지훈이 지어준 것으로, ‘내 마음에 슬픈 노래’라는 뜻이다.

1958년 48세 때 작품집 ‘슬픈동경’
남편 반대로 출간 좌절
‘한양비가’ ‘학생의거혁명가’ 등
1960년부터 활발한 가사 창작활동
1977년 ‘한국현대내방가사집’ 지어
내방가사 명맥 유지 노력 결실

△현대가사문학과 여성단체를 이끌다

회갑기념 출판기념회에서의 조애영.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회갑기념 출판기념회에서의 조애영.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조애영의 가사 창작활동은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인 1960년부터 다시 활발해졌다. 이 시기에 지은‘한양비가’·‘학생의거혁명가’ 등에는 그녀의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이 잘 반영돼 있다.‘한양비가’는 조선의 건국부터 조선의 변천사를 차례대로 나열하면서 해방과 이후 4·19혁명에 이르는 근 현대사를 간추린 장편의 가사다. 조애영은 여러 가지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배운 교훈을 이야기하면서 역사에 대한 의식의 흐름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학생의거혁명가’는 ‘한양비가’에 포함하려다 분량이 너무 방대해져서 따로 분리한 작품으로, 4·19혁명의 전말에 대해 서술하면서 날카로운 비판 의식도 보여준다.

60세인 1970년에는 한국문인협회, 한국시조작가협회, 한국신화학회, 민속학회의 회원으로 활동했다.

이듬해 61세에는 한국수필가협회 회원이 됐으며, 시조 계간지 ‘신시조(新時調)’와 ‘수필문예(隨筆文藝)’를 간행하는 출판사의 고문을 맡기도 했다. 그 해에 시조집‘슬픈 동경’이 재판·간행됐는데, 그 동안의 작품에다 38편의 시조를 추록해 회갑기념으로 출간한 것이다.

또 은촌선생회갑문집 간행위원회에서‘은촌내방가사집’을 출판했는데, ‘화전가’등 19편의 규방가사가 실려 있다. 조애영은 활발한 작품 활동과 더불어 사회활동에도 적극 나섰다. 그 출발은 배화여학교의 동창회지만 점차 그 폭을 넓혀 성균관이나 여성유림회에도 참여했다.

1972년에는 성균관 교화분과 부장을 맡아 활약했다. 이듬해 12월에는 ‘유림월보’(제57호)에‘여성유림의 자세’를 발표해“여성은 가문의 전통을 존중하고, 경로정신에 투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의식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그 뒤 1975년 조애영은 성균관 여성유도회 초대회장이 돼 3년 동안 활동했다.

이듬해인 1976년에는 1년 동안 ‘유림월보’를 통해‘풍속과 습관’이라는 주제로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1977년에는 함께 내방가사를 연구하고 창작하던 여성유도회원들과 그동안 지었던 내방가사를 모아 정순임·고단과 함께‘한국현대내방가사집’을 출간했다. 이는 내방가사의 맥을 이으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은 것이었다.

1979년 7월에는 서울 롯데호텔에서 열렸던 제4차 세계시인대회에 참가해 ‘Mother’라는 시조를 발표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 쓴 조애영의 작품 속에는 한층 더 강한 역사의식이 드러난다.

1987년 가을 ‘배화동창회보’(제6호)에‘무궁화 12곡’을 발표했으며, 12월‘유교신보’에‘갑인왜란애사(甲寅倭亂哀詞)’를 발표해 주실마을에서 일어난 일본인의 횡포를 고발했다. 1991년 ‘배화동창회보’(제9호)에 망국의 한을 노래한‘구한말애사(舊韓末哀詞)’12곡을 발표해 남북한 적십자사총재에게 보냈다.

이어 제10호에는 ‘한말애사(韓末哀詞)’를 발표해 고종의 즉위부터 남북분단까지의 역사를 서술했다. 또한 이 무렵‘한국동란회상곡’을 지어 둘째 오빠 조헌영을 비롯한 납북인사와 이산가족의 아픔을 노래했다. 그러나 ‘유교신보’에 실으려 했던 이 작품은 당국의 검열에 의해 발표되지 못했다.

노익장 동창생.(아랫줄 오른쪽이 조애영)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노익장 동창생.(아랫줄 오른쪽이 조애영)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현대가사문학의 선구자이자 성균관 여성유도회 창립을 주도하고 초대회장으로서 여성유도회를 이끌었던 조애영은 2000년 8월25일 9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조애영은 속박의 굴레를 벗은 신여성이자 항일운동에 앞장선 독립운동가였다. 또 하마터면 사라질 뻔한 우리네 내방가사(內房歌辭)의 맥을 이어 온 여류 문사였다. 특히 그가 영남지방에서 구전돼 내려오는 가사를 모아 자신의 작품과 함께 펴낸 ‘은촌내방가사집’ ‘한국현대내방가사집’은 지금도 문학사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조애영의 현대가사는 조선시대 내방가사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예전의 내방가사가 주로 시집살이나 노처녀의 한탄, 또는 가난한 생활과 힘든 노동에 대한 푸념을 노래했다면 조애영의 가사는 역사와 사회문제를 다룬 것이 많다. 부정에서 긍정으로, 성의 갈등에서 극복과 화합으로 나아간 것이 바로 조애영의 삶이라면 그의 문학은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보다 큰 이상을 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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