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내려 창가로 들이치는 비가 오히려 반가울 만큼, 불같은 여름 더위가 한창이다. 최근에야 집집마다 에어컨을 구비하고 있는데다가, 어디든 널려 있는 카페로 나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한 잔 시켜 놓고 시원하고 편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여름 더위랄 것이 특별할 것도 없는 것 같다. ‘피서’라는 것이 1년 중에 꽤 큰 행사였던 시기에, 산으로 바다로 떠나거나, 물이 있는 곳에 모여 ‘납량회’ 같은 것을 열던 감각에 비해, 집에 가만히 있으면서 밀린 드라마를 보거나 ‘호캉스’를 즐기거나 하는 것처럼 더위를 피하는 일이 커다란 일이 아닌 것처럼 돼버렸다.

사실, 인간이 쌓아올린 근대적인 문명이라는 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서도록 하는 방향으로 급속도로 발전해왔다. 예전이라면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도 못했던 거리를 비행기로, 기차로 연결하고, 더울 때 더위를 피할 수 있게 하고, 추울 때 추위를 피할 수 있게 하며, 시끄러움 속에서 소리를 사라지게 하고, 조용함 속에서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하는 것처럼, 인간이 갖고 있는 태생적인 감각을 보다 무디게, 혹은 편하게 바꾸어 왔다. 그것이 말하자면, 기계문명의 발전이 인간에게 제공해온 감각의 즐거운 퇴화였던 것이다.

 

1.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 2012년 열린책들에서 19권이 번역되어 있다. 100여 편이 넘는 원작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가 번역되었지만, 매그레 경감의 재미를 느끼는 데는 충분히 쏠쏠하다.
1.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시리즈. 2012년 열린책들에서 19권이 번역되어 있다. 100여 편이 넘는 원작을 감안하면 적은 숫자가 번역되었지만, 매그레 경감의 재미를 느끼는 데는 충분히 쏠쏠하다.

이러한 문명의 발전과 인간의 본래적인 감각의 변화 앞에서, 더울 때는 좀 더워야 하고, 추울 때는 추워야지, 같은 의견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꼰대스러운 것임을 부인하고 싶지는 않다. ‘자연스러움’이라는 것이 어디 태초부터 정해져 있는 것이랴. 인간의 감각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변화하는 것이 당연하니 말이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고, 하루에 세 끼를 먹고 하는 감각 내지는 삶의 문화적 습관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나면 점차 변화하여 우리는 또한 새로운 ‘자연스러움’을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처럼, 인간의 감각적 변화에 있어서 당연한 것이나 부당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예전에 존재했던 감각들이 사라져 가는 아쉬움이 있을 뿐이다. 여름밤 낮에 다 소진되지 못한 열기가 공기 속에 남아 여전히 살갗을 파고드는 후텁지근한 감각 같은 것들은 일반적으로야 좋을 수 없는 감각이겠지만, 어떤 기억과 얽혀 있을 때, 그것은 전혀 싫지 않은 감각이 된다.

 

2. 1942년에 출판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The Body in the Library’의 초판 커버. 한국에는 ‘서재의 시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마플이 탐정으로 활약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2. 1942년에 출판된 애거서 크리스티의 ‘The Body in the Library’의 초판 커버. 한국에는 ‘서재의 시체’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다. 마플이 탐정으로 활약하는 대표적인 작품이다.

내게 여름은 어린 시절 방학이면 언제나 찾아갔던 큰집의 기억과 뗄레야 뗄 수 없게 엮여 있다. 낮 동안 더운 줄도 모르고 돌아다녀 벌겋게 상기된 내 팔을 어루만졌던 할아버지의 서늘한 손길. 땀으로 끈적거렸던 등에 얼음장 같이 차가운 물을 부어 등목을 했던 기억. 인근의 큰 도시로 진학하여 남겨진 사촌 형, 누나들의 책이 보관된 웃방에서 책들을 하나하나 열어보던 것이 바로 내가 갖고 있는 여름의 기억이다. 지금이라면 분명 책들보다도 그 위에 뽀얗게 내려 앉아 있었던 먼지가 더 신경 쓰였겠지만, 그때는 그 책 하나하나가 마치 미지의 어딘가로 막 떠나버릴 것만 같은 기차표처럼 보여 허겁지겁 하나, 둘 씩 뒤지느라 먼지 따위에는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당연히 이마를 따라 쉴 새 없이 흘러내리는 땀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확실히 어린 시절에는 무언가 하고 싶은 대상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과자를 먹을 때 손에 달라붙는 과자부스러기들이 신경 쓰여 정작 과자의 맛에는 집중하기 어렵지만, 어린 시절에는 손에 달라붙는 것 따위에 신경 써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 않은가. 인간이 어떤 대상에만 집중해서 모든 그 외의 것들을 잊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복잡한 세계 속 인간관계에 존재하지 않는 어린 시절의 특권인 것만 같다.

 

5. 가장 최근에 사계절사에서 발간된 ‘임꺽정’속에는 그간의 단행본들에는 빠져 있던 편들이 완결되어 10권으로 출판되었다.
3.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1928년부터 1939년까지 무려 12년 간 연재되고도 미완으로 끝난 일제강점기 최대의 대하역사소설이었다. 사진은 최초로 발간된 1939년판 단행본(조선일보사판)의 속표지면.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있어서 여름철의 ‘피서’라는, 더위를 피한다고 하는 행위는 물리적으로 차가운 것을 먹거나 접촉하여 열기를 내리는 것이기도 하지만, 더위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그보다 더 집중할 거리를 만들어 더위를 잊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인간의 감각이란 사실 단순하고 상대적이라, 덥다는 감각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온몸에서 느껴지는 더위의 신호들을 예민하게 받아들이지만, 그에 비해 더 집중할 만한 대상을 찾게 되면, 더위는 금방 잊어버릴 수도 있게 된다.

책을 읽으면서, 또 무언가 즐거운 일을 하면서 더위를 피한다는, 지금 생각해서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운 옛사람들의 감각은 어쩌면 이와 같은 발로일지도 모른다. 더워서 견딜 수 없는 열대야의 밤을 지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입 안에 들어오는 얼음 한 조각일 수도 있고, 더위를 잊어버릴 만큼 집중할 수 있는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좀처럼 더위를 견디기 어려운 여름밤, 책 속의 이야기가 내게 반가운 말을 걸어오는 순간, 나는 그 이야기 세계로 걸어 들어가 피부에 달라붙은 끈끈한 땀의 열기나 한참 전에 꺼진 선풍기 같은 다른 현실적인 것들은 모두 잊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물론, 문자가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시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시대, 상상의 힘은 더욱 약화되고 있어 책을 매개로 하는 이야기 세계에는 좀처럼 집중하기 어려워진 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말이다.

 

4. 홍명희의 ‘임꺽정’은 1939년판의 경우, 의형제편과 화적편의 일부가, 1948년판(을유문화사판)의 경우 의형제편과 화적편만이 담겨 있다.
4. 홍명희의 ‘임꺽정’은 1939년판의 경우, 의형제편과 화적편의 일부가, 1948년판(을유문화사판)의 경우 의형제편과 화적편만이 담겨 있다.

그래도, 여전히, 더위를 견딜 수 없는 밤에 여전히 생각나는 책들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꽤 다행한 일인 것 같다. 어떤 여름날 만큼은 TV를 켜거나 유튜브의 영상을 보기보다는, 수박 한 조각과 맥주 한 잔을 따라 놓고, 책을 읽고 싶은 날이 있는 것이다. 그런 날 만큼은 심오한 내용이 담긴 철학이나 역사에 관한 책이나 예술이나 문학에 관한 책이 아니라, 시리즈로 된 미스테리나 스릴러가 어울린다. 내친 김에 몇 편의 시리즈를 더 볼 수도 있고, 중간에 그만두고 잠을 청해볼 수도 있다.

여름밤이라면 탐정의 현란한 추리에 압도되어 종종 밤을 새버리기 일쑤였던 아서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 시리즈나 사건과 추리 모두에서 극적인 상황을 제시해서 입을 벌어지게 만드는 길버트 체이스 체스터튼의 브라운 신부 시리즈보다는, 감정이입을 자극하는 조르주 심농의 매그레 경감 시리즈나 애거서 크리스티의 마플 시리즈가 추리소설의 팬들에게는 더 좋을 것 같다. 미스테리라는 장르의 특성상 머리를 쓰지 않는 경우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언제나 타인의 상황 속에 들어가 문제를 해결하려는 열혈 형사 ‘매그레’ 경감의 뒤를 따라가는 일이나 옆집 아주머니처럼 수더분한 태도로 동네 곳곳을 누비는 ‘제인 마플’의 뒤를 따르는 일은 책을 계속 읽어나가는 것도, 중간에 그만두고 잠으로 빠지는 일에도 부담은 적다.

다음날 해야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어 잠들지 않고 깨어 있을 수 있다면, 조금 긴 역사소설책에 손을 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첫 부분만 잘 넘기게 된다면, 눈을 감아도 천정에 책의 한 장면, 한 장면이 펼쳐지고 위기에 빠진 주인공의 운명이 궁금해지는 탓에 아마 쉽게 다시 잠들기는 어려워질 것이다. 사실 역사 소설이라면, 역시 한민족의 역사를 다룬 것들이 입에 맞는다. 홍명희의 <임꺽정>이나 황석영의 <장길산>처럼, 역사의 바깥으로 밀려난 사람들의 호쾌한 모험담을 다룬 것도 좋고, 사실 이제 와서 추천한다는 것이 새삼스럽지만, 이번 여름을 기회로, 조정래의 현대사 3부작 <태백산맥>, <아리랑>, <한강>에 도전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우리의 선조들이 이야기인 만큼 크게 어렵지 않게 소설 속에 펼쳐진 세계를 남김없이 내 머리 속에 담아낼 수 있다. 그 세계의 재료가 모두 내 머리 속, 내 경험에서 온 것인 만큼, 책을 읽고 내 머리 속에 만들어진 세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5. 가장 최근에 사계절사에서 발간된 ‘임꺽정’속에는 그간의 단행본들에는 빠져 있던 편들이 완결되어 10권으로 출판되었다.
5. 가장 최근에 사계절사에서 발간된 ‘임꺽정’속에는 그간의 단행본들에는 빠져 있던 편들이 완결되어 10권으로 출판되었다.

문자로 가득한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렇게, 영화를 보는 것과는 다르다. 저기 내 바깥에 존재하는 스크린에 영사된 영화가 오직 감각만으로 수용 가능한 유사 현실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책 속에 존재하는 세계는 어느 것이나 독자가 그 속에 존재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각적 이미지가 넘쳐나는 시대에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고단함 때문에, 책읽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리라.

어쨌거나, 여름밤은 그렇게 흘러간다. 누군가는 여름밤을 빨리 보내고 싶어서, 누군가는 이 여름밤을 쉽게 보내고 싶지 않아서 못 다 읽은 책을 펴든다. 비록 몇 장 읽지 못하고 그만두기를 반복하면서도 쉽게 책을 아예 덮지는 못하는 것은 분명 아직 어딘가에 그리운 무엇인가가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여름밤은 흘러간다.

/송민호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