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1992년 중국의 최고 실권자였던 등샤오핑은 오늘날 중국의 근대화를 이룬 정치 지도자다.

‘작은 거인’이라는 별명을 가진 그는 흑묘백묘론을 앞세워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한다.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중국 인민이 잘 살면 그것이 최고라는 사상으로 중국의 오늘을 있게 한 것이다.

그의 개방 정책은 오늘날 중국을 G2 국가로 성장시킨 배경이 됐다는 점에서 그는 긍정적 지도자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그의 개방 정책이 한편으로 중국의 민주화 열기를 끌어들였고, 이를 진압하는 선봉에 그가 섬으로써 그는 긍정과 부정의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로 남아 있다.

그의 개방 정책으로 일어난 중국에서의 민주화 요구는 급기야 천안문 사태로 발전한다.

부정부패 척결과 민주화를 요구한 수십만 군중을 향해 등샤오핑은 전차와 장갑차를 동원, 진압에 나선다. 무차별적으로 쏘아 댄 최루탄과 실탄 등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한다.

1989년 당시 중국 정부의 공식 발표는 사망자 200명 정도다.

하지만 항간에서는 수천명, 영국정부의 외교문서를 인용한 언론 보도에서는 1만명이 넘는 사람이 숨진 것으로 전해졌다.

올해 6월로 중국의 천안문 사태는 발발 30년째가 된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중국의 젊은이와 지식인에게 천안문 사건은 잊혀진 과거사일뿐이다.

중국 정부가 빠른 경제성장에 집중하면서 중국인 머리에는 천안문 사태는 지워지거나 잘못된 민중 항거정도로 기억되고 있기 때문이다.

공산당인 중국에서의 민주화는 여전히 미완의 숙제라 할 수 있다.

송환법으로 촉발된 홍콩의 시위사태가 천안문 사태 30년을 기점으로 더욱 폭발하고 있다.

중국 인민군의 홍콩 접경지 집결 등 중국 정부의 대응 움직임도 심상찮아 국제사회가 촉각을 곤두세우게 한다.

중국으로 반환된 땅이라 하지만 홍콩의 국제적 위상은 여전히 자본주의 가치 존중과 인권의 보루라는 상징성에 있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무력진압이 진행되면 국제사회의 경제 질서는 심대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홍콩경제가 예측불허의 충격에 빠져들 수 있는 것이다. 국제사회는 홍콩사태에 대한 중국의 접근 방식을 눈여겨보고 있다. 제2의 천안문 사태가 일어날까 봐서다. /우정구(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