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7년 포항 흥해서 태어나 농업·교사일하며 생업 이어가던 중
1908년 3대 산남의진 의병 맡아 포항·영일지역을 주무대로 활동
유격 전술로 영양·안동 등 도내 시·읍서 크고 작은 전적 거뒀지만
日軍 반격에 1910년 완전히 무너져… 매년 6월1일 체험행사 가져

포항 영일민속박물관 우측편에 자리잡고 있는 ‘한말의병 항왜혈전’기념비. 지난 1967년 3월 29일, 산남의진 의병들의 항일정신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제74주년 광복절을 맞아 포항이 낳은 최세윤 의병장의 일대기가 재조명되고 있다. 최근 일본이 침략역사에 대한 반성과 사죄는 하지 않고 오히려 경제보복 조치를 단행하며 반일감정이 극한으로 치닫고 있어 의미를 더하고 있다.

최세윤 대장이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항일 의지는 국가와 지역을 지키는 애국정신으로 새롭게 살아나고 있다.

15일 포항시 등에 따르면 최세윤 산남의진 3대 의병대장은 1867년(고종 4년) 포항 흥해에서 출생했다. 산남은 경북도 문경 새재 이남의 영남지방을 일컫고, 의진은 오직 구국 일념의 충성된 의기로 뜨겁게 뭉쳐진 의병 진영을 줄인 말이다.

1대 정환직, 2대 정용기, 3대 최세윤 대장까지 이어진 산남의진은 ‘태백산 호랑이’로 알려진 신돌석 의병장 부대와 함께 구한말 제2단계 의병운동을 대표하고 있다. 주된 무대는 포항과 영일 일대였다.

최 대장은 본래 무력과는 거리가 있었다. 농업과 교사일을 하면서 생업을 이어가던 그는 2대 정환직 대장의 순국이후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산남의진 700여 병력이 흥해사람 정순기의 지휘 아래 청송군 보현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평소 정환직과 가까이 지내던 최세윤에게 사람을 보내 산남의진의 지휘를 간곡히 부탁했다. 하지만 당시, 의병들의 활동여건은 녹록지 않았다. 문경새재 이남의 영남지방을 일컫고, 의진은 오직 구국 일념의 충성된 의기로 뜨겁게 뭉쳐진 의병 진영했으나 일본군의 전력이 날로 증강되고 조직화됐기 때문.

반면, 의진은 무기와 군량이 바닥나 사기가 떨어질대로 떨어진 상태였다. 최세윤 대장은 이에 굴하지 않고 ‘기지’를 발휘해 전략을 바꿨다. 전체 의병을 4개 대대로 편성하고 유격 게릴라 전술을 감행한 것. 영양·진보·안동 등의 시, 읍을 산발적으로 공격해 크고 작은 전적을 거두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았고 대장 최세윤을 비롯한 많은 지휘관과 군병들이 하나둘 체포되거나 살해당하는 등 남은 병력이 뿔뿔이 흘어졌다. 산남의진은 1910년 일본세력을 몰아내고 명실공히 자주독립 국가를 이루겠다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완전히 무너지고 말았다.

최 의병장의 한말의병 항왜혈전 기념비가 있는 영일민속박물관에서 만난 한 시민은 최 대장의 ‘항일정신’이 오늘날 현 상황을 타개하는데 주춧돌이 된다고 했다.

시민 정모(47)씨는 “현재도 일본의 국력이 우리나라보다 큰 것은 기정사실”이라며 “하지만 일본이 개헌을 통한 자위대 운용변경 등 야욕을 보이고 있는 상황속에서 선조들의 항일역사가 후손들에게는 큰 교훈이 된다”라고 되새겼다.

최기출 최세윤의병대장 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은 “사업회에서 선열의 정신을 기리기 위해 매년 6월 1일 의병의날을 전후로 체험행사를 하고 있다”며 “당시 상황과는 많이 다르지만, 우리 후손들이 선열들의 항일정신을 지혜롭게 이어받아 한일관계 극복에도 도움이 됐으면 하다”고 말했다.

한편, 최세윤 의병대장의 묘소는 흥해 선산에 모셔졌다가 지난 1976년 10월께 서울 동작동 국립묘지 순군 선열묘역으로 안장됐다. /황영우기자 hyw@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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