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남이(南怡)의 옥사

그때도 있었을 장기 숲.  장기천 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고, 겨울철 북서풍과 경작지 서리피해 뿐 아니라, 탱자나무를 심어 군사림의 역할을 했던 숲이다. 10여리 뻗쳐졌던 숲은 사라지고 현재는 아름드리 노거수가 20여 그루 남아있다.
그때도 있었을 장기 숲. 장기천 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고, 겨울철 북서풍과 경작지 서리피해 뿐 아니라, 탱자나무를 심어 군사림의 역할을 했던 숲이다. 10여리 뻗쳐졌던 숲은 사라지고 현재는 아름드리 노거수가 20여 그루 남아있다.

세조 시절, 계유정난과 세조의 즉위를 도운 공신들이 있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를 중심으로 한 정난공신(구공신)들이다. 이들은 권력의 실세들로서 세조를 등에 업고 전횡을 일삼았다. 그러다 결국 세조 말년에 북방에서 이시애가 난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 이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젊은 공신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병마도총사 구성군(龜城君) 이준, 병마부총사 조석문, 진북장군 강순, 좌대장 어유소, 우대장 남이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난이 끝난 후 모두 적개공신(신공신)으로 책봉되었다. 

이시애의 난으로 빛을 본 사람이 또 한 사람 있다. 바로 유자광이다. 그에 대한 역사의 평가는 ‘고변과 음해로 정적을 숙청해 영달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유배지에서 삶을 마친 간신’ 정도로 요약 된다. 그는 서자 출신이었기에 벼슬길에 나가기 힘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시애의 난을 초기에 진압하지 못해 세조가 어려움을 겪을 때, 대담하게 진압계책을 올렸다. 세조는 그를 불러 자질을 살펴본 뒤 전장에 투입했고, 그는 보란 듯이 공을 세웠다. 이 일로 유자광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벼슬도 얻게 되었다. 

신공신들의 등장으로 안정되어 있던 정국에는 작은 파란이 일었다. 한명회와 신숙주는 이시애의 난으로 잠시나마 옥살이를 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반면에 신공신들은  무골 기질의 세조에게 총애를 받음으로써, 신·구세력 간에는 갈등이 싹트기 시작했다. 

게다가 1467년 9월, 요동의 여진족이 소요를 일으키자 명나라가 군대를 출동시키면서 조선에 지원 군대를 요청했다. 이때 강순(康純), 남이, 어유소 등이 출전해 여진의 소요를 진압함으로써 또 한 번 개가를 올렸다. 이런 일련의 사태를 통해 강순이 영의정에 올랐다. 조석문은 좌의정이 되었고, 화려한 가문적 배경과 뛰어난 무인적 기질을 가진 남이가 나이 스물여섯에 병조판서에 등용되었다. 바야흐로 신공신들이 정국의 전면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영화는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이들을 그토록 아꼈던 세조가 세상을 떠나고, 예종이 즉위했기 때문이었다. 즉위 당시 열아홉이었던 예종은 세조의 둘째아들이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이제 구공신인 한명회와 신숙주가 정권을 좌지우지하게 될 무대가 꾸며졌다. 

 

남이 장군 가묘.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에 있다.
남이 장군 가묘. 강원도 춘천의 남이섬에 있다.

세조의 죽음으로 그 유일한 지지대마저 사라져 버린 신공신들은 속절없이 구공신들에게 당해야만 했다. 신공신의 중심이었던 구성군과 남이는 왕실의 종친이었다. 구공신들은 이런 왕실 인척들이 세력을 키우는 것을 견제하면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신공신들은 경험이 많고 교활한 구공신들의 적수가 되지는 못했다. 신공신들은 대부분 이시애의 난 진압 이후 급성장한 무장들이었고, 구성군과 남이는 20대의 동갑내기였다. 특히 구성군은 정치적인 야심이 없던 인물로, 야심이 컸던 남이와는 어울리기 힘들었다. 그렇다 보니 뭉치기는커녕, 자신들끼리도 알력을 빚었다. 그중에서도 유자광은 모사에 능하고 계략에 뛰어난 인물이었다. 자신과 함께 공을 세운 남이가 세조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을 늘 시기했었다. 설상가상으로 예종도 원래 남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무예에 뛰어나고 성격이 강직할 뿐 아니라 세조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던 남이에 비하면, 자신은 정사 처리에도 능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인 세조의 신뢰도 두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468년 9월 7일, 예종이 즉위하던 바로 그날 조회(朝會)때였다. 한명회가 임금에게 “남이는 병조판서로 있기에는 적당하지 못하다”고 아뢰었다. 이 말을 들은 예종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 자리에서 남이를 겸사복장(兼司僕將)으로 발령을 내버렸다. 병조의 우두머리를 궁궐 경비대장인 겸사복장(종2품 무관직)으로 깔아뭉개 버린 것이다. 예종이 임금으로서 행했던 첫 업무가 남이의 좌천이었던 것을 보면, 그동안 구공신들과 예종이 얼마나 남이를 미워했던가를 엿볼 수 있다. 그렇지만 남이는 언제든지 재기할 수 있는 기개와 인맥을 갖추고 있었다. 구공신과 예종이 그를 두려워한 것도 바로 그 점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남이의 세력들을 발본색원하여 축출할 기회를 찾고 있었다. 

드디어 신공신들을 한꺼번에 제거할 기회가 포착되었다. 예종이 즉위한지 불과 한 달이 지난, 1468년 10월 24일 늦은 밤이었다. 병조참지(兵曹參知:정3품)로 있던 유자광이 예종을 찾아와 남이가 역모를 꾀하고 있다고 고변을 했다. 남이가 궁궐 안에서 숙직을 하고 있던 중에 혜성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는 “혜성이 나타난 것은 묵은 것을 없애고 새것을 나타나게 하려는 징조다”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유자광의 고변내용은 구체적이지도 않았고 두루뭉술하여 의문투성이였으나, 예종은 이를 따져 보지 않았다. 남이가 곧 군사라도 몰고 쳐들어올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도성의 경비를 철통같이 하고는 바로 남이를 체포하게 했다. 

그날 밤 주요 종친들과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예종이 직접 남이를 심문을 했다. 그러나 남이는 역모사실을 부인했다. 예종은 남이에게 별다른 혐의를 찾을 수 없자. 유자광을 불러 대질을 했다. 그제야 유자광이 고변자란 사실을 알게 된 남이는 머리로 땅을 치면서 “유자광이 나를 모함한 것이다”라고 부르짖었다. 남이가 계속 부인하자 예종은 남이의 측근 무장들을 하나씩 불러들여 고문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 대부분이 역모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껏 남이의 첩 탁문아(卓文兒)가 심한 고문에 못 이겨 ‘남이가 세조의 국상 중에 고기를 먹었다’고 자백한 것 정도가 전부였다. 

하지만 여진족 출신의 무장 문효량(文孝良)이 혹독한 매를 맞다가 견디지 못하고 남이에게 불리한 진술을 해버렸다. 갑자기 상황이 반전되었다. 분위기상 이제는 도저히 살아남을 수 없다고 판단한 남이도 마지못해 역모혐의를 시인했다. 그러나 그는 그냥 죽으려 하지 않았다. 같은 신공신으로 영의정에 있던 강순을 물고 들어갔다. 영문도 모른 채 잡혀온 강순은 남이에게 ‘왜 나를 끌어들였느냐’고 따졌다. 남이의 답변이 가관이었다. ‘영의정임에도 내가 무고를 당하고 있는 줄 알면서도 한마디 구원도 해주지 않았으니, 당신도 나와 같이 원통하게 죽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경북 영양의 남이포. 한을 품고 죽은 영혼이 신령으로서의 영험이 크다는 믿음 때문인지 전국적으로 남이장군과 관련된 사당과 지명이 많다.
경북 영양의 남이포. 한을 품고 죽은 영혼이 신령으로서의 영험이 크다는 믿음 때문인지 전국적으로 남이장군과 관련된 사당과 지명이 많다.

결국 이들에게는 모반대역죄가 적용되었다. 예종은 1468년 10월 27일 군기감 앞 저자거리에서 남이·강순·조경치(曺敬治)·이중순(李仲淳)·변영수(卞永壽)·변자의(卞自義)·문효랑·고복로(高福老)·오치권(吳致權)·박자하(朴自河) 등을 능지처참했다. 이어 남이를 따르던 여러 무장들도 참형을 시켜 싹을 잘랐다. 남이의 심복인 조영달(趙穎達)·이지정(李之楨)·조숙(趙淑) 등 25인과, 장용대(狀勇隊)의 맹불생(孟佛生)·진소근지(陳小斤知)·이산(李山) 등이 그들이다. 이 사람들의 아버지와 자식들도 모두 죽였다. 

반면에 이 일에 공을 세운 한명회, 신숙주 등 37명을 익대공신(翊戴功臣)으로 책봉했다. 한명회는 임금에게 남이·강순 등의 재산과 처첩들을 내려 달라고 주청했고, 임금은 그들의 재산과 처첩을 익대공신들에게 나누어 줬다. 옥사에 연루된 사람들의 처첩들이 마치 전리품처럼 취급되어 모두 정적(政敵)들의 하녀로 분배가 됐다. 

이게 남이의 옥사 전말이다. 심한 매질을 당하던 강순은 ‘공모자를 더 대라’는 예종의 심문에 “내가 만약 여기 있는 신하들도 다 공범이라고 말한다면 임금님은 믿겠습니까?”라고 항의를 했고, 남이의 종사관이었던 조숙은 “한 충신이 죽는다”고 소리를 지르면서 죽어 갔다. 이처럼 이 옥사는 처음부터 의문투성이였고, 수긍이 가지 않은 옥사였다.  

화는 관련자들의 가족들에게도 미쳤다. 남이의 어머니에게는 ‘세조의 상(喪)중에 고기를 먹고, 아들인 남이와 간통을 했다’는 희한한 죄를 씌워 저자거리에서 수레에 묶어 찢어죽이고, 3일 동안 효수(梟首)하게 했다. 이 사건에 연좌되어 종이 되었던 처와 첩들이 70여 명이나 된다. 이들의 삶이 어떠했는지는 ‘조선왕조실록’에 그 사례가 적혀있다. 거열형에 처해진 강순은 정실부인이 죽자 ‘중비(仲非)’와 혼인을 했다. 이 사건으로 처첩들이 분배될 때, 중비는 유자광의 여종이 되었다. 영의정의 아내로 정경부인이던 중비가 서얼출신 간신의 노비로 추락했던 것이다. 게다가 그녀는 남편 강순이 죽은 지 한 해가 넘지 않은 시점에 집안의 옛 종으로 있었던 막산(莫山)이란 남자에게 겁탈을 당하고 만다. 중비는 모든 것을 체념하고 막산과 살림을 차린다.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어디까지나 실록에 실려 있는 실화이다. 그런데 막산은 이미 아내가 있는 몸이었다. 그 아내가 중비를 달가워할 리가 없었다. 중비와 막산의 아내는 대판 싸움을 했다. 이때 막산은 중비의 편을 들었다. 결국 막산의 본처는 집에서 쫓겨났고, 그 자리를 중비가 차지하게 되었다.  

소문은 금세 전국에 퍼졌다. 명분에 사는 유학자들이 들고 일어났다. 조선사회를 이끌었던 양반들은 “막산이 옛 주인인 중비와 간통하고 동거했다. 중비가 지금은 종의 신분이지만 옛날에는 막산을 종으로 데리고 있던 양반집 규수였다. 이는 일반적인 간통이 아니라 종이 주인의 처를 간통한 법률(奴奸家長妻律)로써 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남자종이 여주인과 간통을 하면 참형(斬刑)에 처하는 것이 당시의 법이었다. 사건은 의금부로 넘어갔다. 의금부 관리들은 최종심에서 오히려 중비가 행실이 바르지 못한 여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막산에게 처음에는 강간을 당했을 수도 있지만, 피해자가 적극적인 항거를 하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또 정조를 잃은 뒤 막산의 아내가 되기로 작정하고, 막산의 처를 때려서 쫓아낸 것은 음탕함의 증거이므로 중비와 막산을 참형에 처해야 한다고 임금에게 아뢰었다. 1471년 3월 17일, 당시 임금 성종은 의금부 건의대로 막산과 중비를 참형에 처했다. 명분은 풍속(風俗)을 바로잡는다는 것이었다. 

조선시대 양반들의 이중적인 잣대는 여성들과 서얼들에게는 참으로 가혹했다. 동료  부인을 자신의 여종으로 삼는 것에는 거리낌이 없었다. 그렇게 노비가 된 부인이 궁여지책으로 남자노비와 결혼하는 것은 또 용서하지 못했다. 조선시대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에 서얼은 아예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규정을 해 놓았다. 이들은 가정에서도 천하게 취급되어 재산 상속권마저도 박탈되었다.  

그런데도 형벌을 받는 데는 이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연좌시켰다. 좋은 것은 자기들끼리 차지하고, 자기들이 나쁜 짓을 한 행위에는 이들까지 동참시켜 처벌받게 하는 양반사회의 이중성. 성리학이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자리를 잡았던 그 모순투성이의 조선사회에서 살지 않았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중앙에서 이런 큰 옥사가 벌어지자 바닷가에 한적하기만 했던 경상도 장기 고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1469년 2월 3일부터 그해 12월 24일까지 이 난에 연좌되었다며 일곱 명이 장기로 유배를 왔다. 강순의 친동생인 강선(康繕)), 조경치의 계모(繼母) 종금(終今)과 서얼 형 조중생(曺仲生)·조계생(曺繼生)·조말생(曺末生), 이중순의 아우 이숙순(李叔淳), 이영산(李永山)등이 그들이다.

 

남이장군 기마상. 남이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경남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에 있다.
남이장군 기마상. 남이 할아버지의 묘소가 있는 경남 창녕군 부곡면 구산리에 있다.

이때 장기로 온 강선은 약 2년간 이곳에서 머물다가 1471년(성종2년) 2월에 보령(保寧) 근처로 옮겨갔다. 이중순, 그리고 조경치의 계모 종금은 장기로 왔다는 기록만 있고, 옮겨가거나 방면했다는 기록이 없다. 아마 중간에 이곳에서 사망한 듯하다. 이영산은 장기현의 관노로 5년간 있다가, 1474년 4월 7일에야 방면되어 돌아갔다.

남이가 실제 역모를 획책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이 사건에 대해 임진왜란 전까지는 남이를 난신(亂臣)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임란 이후 일부 야사(野史)에서는 남이의 옥사가 유자광의 모함으로 인한 날조된 옥사라고 규정하고, 그를 젊은 나이에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죽은 영웅적 인물로 기술하고 있다.

남이의 억울함은 1818년(순조 18)이 되어서야 후손인 우의정 남공철의 주청으로 풀려, 강순과 함께 관작이 복구되었다. 후에 충무공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창녕의 구봉서원, 서울 용산의 용문사 및 성동의 충민사에 배향되었다. 

이것 외에도 남이를 신으로 모시고 있는 신당들이 꽤 많다. 전통 무당들은 각자 자신의 신을 모시는데, 역사 인물 중 억울하게 죽음을 당한 영웅들이 곧잘 무당의 신으로 등장한다. 이는 한을 품고 죽은 영혼이 신령으로서의 영험이 크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하고, 백성들이 이들의 영혼을 달래준다는 의미도 있다. 그래서 일까. 춘천 남이섬에는 가짜 남이장군의 묘도 생겨났다. 경남 창녕에는 남이장군을 기리는 충무사가 있고, 경북 영양의 ‘남이포’처럼 남이와 관련된 지명들도 생겨났다. 
사내대장부의 기개를 웅장하게 뽐내다 혜성과 함께 사라진 남이에 대한 흔적들이  바로 우리주변, 장기에도 있었다는 게 새삼스럽다.

 /향토사학자